30/10/2025
우리 할머니의 방앗간
새벽 안개가 마을 골목길을 덮을 때,
낡은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드르륵— 드르르르르—’
하는 기계음이 울렸다.
사람들이 잠든 시간에도
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곳은 할머니의 방앗간이었다.
커다란 맷돌이 천천히 돌아가며
쌀알을 으깨고,
흰 가루가 구름처럼 날렸다.
할머니는 헝겊으로 입을 가리고
천천히 손으로 쌀을 밀었다.
손등의 혈관이 불거지고,
주름마다 가루가 스며들었다.
“할머니, 이제 그만 하세요.
이 기계 너무 오래됐어요.”
마을 이장이 몇 번이나 말렸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 손 같아.
이게 멈추면, 나도 멈추지.”
그 말에는 오래된 세월의 무게가 있었다.
한때 이 방앗간은
명절이면 사람들로 붐볐다.
떡쌀, 고추, 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고,
할머니는 그 틈에서
땀을 훔치며 웃었다.
그 시절,
방앗간은 마을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심장은 더디게, 조용히 뛰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마트와 공장 제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매일 문을 열었다.
문지방을 넘어오는 발자국이 하나라도 있기를 바랐다.
하루는, 손녀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대학에 다니느라 몇 달 만의 방문이었다.
“할머니, 요즘 손님도 없는데
왜 계속 하세요?”
할머니는 잠시 맷돌을 멈추고
손녀를 바라보았다.
눈가엔 흰쌀가루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 방앗간은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니야.
네 아버지도 여기서 놀았고,
네 엄마도 여기서 떡을 만들었지.
이 소리, 이 냄새…
그게 우리 집 역사야.”
손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공기 속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저녁이 되자,
할머니는 방앗간 불을 끄지 않았다.
혼자 남아 오래된 기계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손끝으로
기계의 녹슨 부분을 천천히 닦았다.
“아이고, 고생 많다.
그래도 아직 잘 도네…”
그녀는 마치 사람을 대하듯 말했다.
그때, 문이 삐걱 열렸다.
한 남자가 쑥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혹시 깨 좀 빻아주실 수 있을까요?
마트 건 향이 안 나서요.”
할머니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럼요. 여기 놓고 가세요.”
그녀의 손놀림은 여전히 섬세했다.
기계가 다시 돌아가며
방앗간 안에 소리가 퍼졌다.
‘드르르르— 드르르—’
손녀는 그 장면을 조용히 지켜봤다.
기계음이 마치 오래된 노래처럼 들렸다.
다음 날 새벽,
손녀가 방앗간에 들어섰을 때
기계는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의자에 기대 잠든 듯 앉아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손엔 아직도 쌀 주머니가 쥐어져 있었다.
기계 옆에는 손녀에게 남긴 쪽지 한 장.
“이 기계는 네게 줄게.
이 소리를 잊지 말아라.
우리 집의 맥은 여기 있으니까.”
손녀는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스위치를 눌렀다.
‘드르르르—’
기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마치 할머니의 숨결처럼,
방앗간을 따뜻하게 채웠다.
몇 년 후,
마을에 작은 간판이 새로 걸렸다.
〈손녀의 방앗간 — 전통 그대로〉
젊은 여인이 기계 옆에서
하얀 가루를 털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기계 위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눈부시게 흰 쌀가루 속에서
할머니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