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원정대

역사원정대 역사원정대 History Expedition - Histoly는 역사의 기록에서 지식을 탐구하고 역사의 현장에서 지혜와 통찰을 얻어 오늘과 내일의 길을 살피는 지식 탐험대입니다. 역사원정대는 역사 기록과 유적을 살피고 저자와 협업하여 책을 비롯한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기획합니다.

BC 3세기 이후 규슈와 혼슈 서부 등 일본열도에도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화가 이뤄진다. AD 3세기까지 약 600년간 지속된 야요이시대이다. 1884년 도쿄의 야요이쵸에서 이전의 조몬식 토기와 다른 ‘야요이식 ...
17/09/2025

BC 3세기 이후 규슈와 혼슈 서부 등 일본열도에도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화가 이뤄진다. AD 3세기까지 약 600년간 지속된 야요이시대이다. 1884년 도쿄의 야요이쵸에서 이전의 조몬식 토기와 다른 ‘야요이식 토기’가 발견되면서 야요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야요이문화의 최대 특징은 수도작이 시작되면서 농경문화가 생성되고 발전된 사실이다. 일본 벼농사의 출발지를 놓고서는 동남아 유래설과 중국 강남설, 중국 북방설 등으로 분분하지만 근자에는 한반도 남부설이 가장 유력해졌다. 구체적으로는 진주와 김해 등 경상남도 내륙과 영산강유역이 주목받고 있다.

야요이문화와 ‘퍼즐 빠진 조각그림’ ① - 한일 고대사의 재건축

https://blog.naver.com/sansuyabooks/224011581771

11/09/2025

과거의 영웅이었던 이순신을 재조명하여, 그의 리더십과 비전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실천적 지혜’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주는 책,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와 함께, 비전을 실현시킨 위대한 영웅의 실천력과 마주하는 특별한 여행을 시작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순신은 불패의 장수이자 조선을 구한 영웅입니다. 장한식 작가의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는 익숙한 영웅의 서사에서 더 나아가, 이순신이 전쟁 중에 품었던 비전을 ‘수국(水國) 프로젝트’라는 독창적인 틀로 섬세하게 그...
11/09/2025

이순신은 불패의 장수이자 조선을 구한 영웅입니다. 장한식 작가의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는 익숙한 영웅의 서사에서 더 나아가, 이순신이 전쟁 중에 품었던 비전을 ‘수국(水國) 프로젝트’라는 독창적인 틀로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독자는 책을 통해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격랑 속에서 구축하려 했던 이상적인 해양 국가, ‘수국’의 흥미로운 설계도를 마주할 것입니다.

장한식 저자는 수국을 단순히 남해안의 해군 기지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자율적인 해상 방어 시스템이자 백성을 보호하는 든든한 울타리로 이해합니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 용병술, 그리고 백성을 향한 사랑과 신념이 어떻게 수국 건설이라는 원대한 꿈을 향해 나아갔는지 설득력 있게 펼쳐냅니다.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의 가치는 영웅의 빛나는 업적 뒤에 가려진 탁월한 리더십의 정수를 탐구하는 데 있습니다. 저자는 이순신 장군이 수많은 위기 속에서 내린 판단,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통찰력, 혁신적인 사고, 강력한 소통 능력을 ‘수국이라는 렌즈’를 통해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주요 해전을 따라가며, 각 전투 속에 담긴 그의 전략적 사고와 혁신적인 전술을 ‘수국 프로젝트’라는 큰 그림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합니다.

과거의 영웅이었던 이순신을 재조명하여, 그의 리더십과 비전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실천적 지혜’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주는 책,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와 함께, 비전을 실현시킨 위대한 영웅의 실천력과 마주하는 특별한 여행을 시작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순신이 수국이라는 이상적인 해양 국가를 꿈꾸며 보여 준 헌신, 책임감, 그리고 미래를 향한 통찰력은 격변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깊은 영감을 선사할 것입니다.

불멸의 영웅, 시스템을 설계하다 -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https://blog.naver.com/sansuyabooks/224003929581

대륙 전역에 끝없는 호황을 안겨줄 것 같은 은이 1590년대 어느 날부터 시장에서 부족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에 유입되는 해외 은의 공급량은 시대별로 들쭉날쭉하였기에 은 부족 사태는 수시로 반복되었다. 1640년대에...
08/09/2025

대륙 전역에 끝없는 호황을 안겨줄 것 같은 은이 1590년대 어느 날부터 시장에서 부족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에 유입되는 해외 은의 공급량은 시대별로 들쭉날쭉하였기에 은 부족 사태는 수시로 반복되었다. 1640년대에도 백은 유입량이 급감했다는 분석이 있다.) ‘백은의 반격’이 시작된 셈이다. 가파른 은수요 확대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외산 백은의 공급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중국 영토 내의 은광개발도 신통치 않았다.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열도를 통일하고 전국시대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일본 내 유럽무기 수요가 급감하였다. 일본 은의 해외 유출 요인이 줄어든 셈이니 중국으로의 유입도 당연히 감소하게 된다. 게다가 조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조선을 매개로 한 중일 무역이 중단되면서 일본 은의 유입은 뚝 끊기고 말았다.

중남미 은의 유입에도 차질이 생겼다. ‘아르마다’라고 불리던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1588년 7월 영국함대에게 완패하였다. 한 번의 싸움에서 패했다고 해상왕국 스페인의 역량이 당장 쪼그라든 것은 아니었지만 스페인 몰락의 서곡이 되었고 중국과의 동방무역도 쇠퇴하는 조짐을 보였다.

백은의 반격, 중국의 위기 ① -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https://blog.naver.com/sansuyabooks/223999859234

유비는 사람의 심리도 지극히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었다. 아들 아두를 한 번 내던짐으로써 조운을 감복시켰다. 동생들인 관우와 장비에게는 “형제는 수족과 같고 처자는 의복과 같다.”라는 말로 그들의 오장육부까지 움직였...
05/09/2025

유비는 사람의 심리도 지극히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었다. 아들 아두를 한 번 내던짐으로써 조운을 감복시켰다. 동생들인 관우와 장비에게는 “형제는 수족과 같고 처자는 의복과 같다.”라는 말로 그들의 오장육부까지 움직였다.

사람을 알아보는 타고난 생래적인 능력 역시 그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조조는 의심이 많았다. 늘 주위의 사람들에게 부담을 가져야 했다. 유비는 이런 염려가 전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유비는 정의로 부하들과 관계를 맺었다. 부하들의 마음이나 몸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조조는 이익과 법률로 부하들과 관계를 맺었다. 부하들의 몸만 얻을 수 있었다. 마음을 얻을 수는 없었다. 유비는 주동적이고 조조는 피동적이었다. 유비는 감성적이고 조조는 무서웠다. 이는 사람을 쓰는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맨주먹으로 지존이 된 자수성가형 리더, 황제 유비 이야기 ②

https://blog.naver.com/sansuyabooks/223996712612

유방은 귀도 얇았다. 어떻게 보면 팔랑 귀였다. 성격이 더러운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남의 말을 잘 듣기도 한 것이다. 주위에 그에게 훈수를 들어주는 스승이 많았던 것 역시 그의 성향과 갚은 관계가 있었다.그의 첫 번...
04/09/2025

유방은 귀도 얇았다. 어떻게 보면 팔랑 귀였다. 성격이 더러운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남의 말을 잘 듣기도 한 것이다. 주위에 그에게 훈수를 들어주는 스승이 많았던 것 역시 그의 성향과 갚은 관계가 있었다.

그의 첫 번째 스승은 ‘역이기’였다. 지식인을 멸시하는 그의 오만한 태도를 고쳐주는 데 일조를 했다. 더불어 그에게 진류를 기습, 대량의 군량미를 빼앗으라는 계책을 건의해 세력을 확충할 수 있도록 도왔다.

두 번째 스승은 ‘동공’이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명분이 정당하지 않으면 말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라면서 항우를 타도하는 절호의 명분은 의제의 복수를 한다는 기치를 내거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줬다. 이렇게 해서 유방은 천하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여론에서 항우에게 이기고 들어간 것이다.

경청의 리더십과 용인술의 지존이 된 리더, 황제 유방 이야기 ②

https://blog.naver.com/sansuyabooks/223993553485

삼도수군통제영은 해군본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권한과 높은 위상을 지녔고, 통제사도 현재의 해군참모총장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였다. 통제사는 군령권과 군정권은 물론이고 행정권 · 사법권 · 경제권까지 지닌 해...
01/09/2025

삼도수군통제영은 해군본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권한과 높은 위상을 지녔고, 통제사도 현재의 해군참모총장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였다. 통제사는 군령권과 군정권은 물론이고 행정권 · 사법권 · 경제권까지 지닌 해왕(海王) 같은 존재였고 통제사가 관장한 통제영은 삼남 해변 70여 개 고을의 생사를 좌우하는 해변 수도나 다름없었다.

​그랬던 만큼 조선의 무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두룡포의 주인’ 즉, 수군통제사가 되어 삼남 해역을 호령하기를 희망하였다. 통제사야말로 해상의 두룡(頭龍), 즉 우두머리 용이었던 셈이니 ‘두룡의 포구’라는 뜻을 지닌 통영시의 옛 지명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통제사는 임기를 순조롭게 마칠 경우 중앙 군영의 대장이나 판서, 정승으로까지 도약할 수 있는 핵심 보직이었기에 ‘무신들의 로망’이었다.

‘무신들의 로망’ 삼도수군통제사 - 바다를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

https://blog.naver.com/sansuyabooks/223990084397

일본은 16세기 중엽 조총과 화약이 전래된 이후 전투의 양상도 개인전에서 집단전으로 바뀌었다. 작전법에 있어서도 후방을 교란하는 전술을 배합하고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여 당시 일본은 조선이나 명나라가 얕잡아 ...
28/08/2025

일본은 16세기 중엽 조총과 화약이 전래된 이후 전투의 양상도 개인전에서 집단전으로 바뀌었다. 작전법에 있어서도 후방을 교란하는 전술을 배합하고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여 당시 일본은 조선이나 명나라가 얕잡아 보던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해외 원정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1586년 즈음부터 다이묘들에게 선박을 건조하게 하는 등 방대한 선박 건조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 결과 임진왜란 개전 직전에는 1,000여 척의 병선을, 전쟁 말기에는 3,000여 척의 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개전 2년 전인 1590년부터는 각 다이묘들에게 병력 동원을 지시하여 33만여 명의 군사가 준비 태세를 갖추었으며, 군량 역시 미리 비축하게끔 명령했다.

일본의 야심찬 전쟁 준비와 조선의 안일한 대응 - 임진왜란 대비하지 않으면 다시 온다

https://blog.naver.com/sansuyabooks/223986283098

“광무제 중원 2년(AD 57)에 왜의 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조하하였다. 왜의 사신은 대부를 자칭하였다. (노국은) 왜국에서 가장 남쪽의 나라이다. 광무제는 사신에게 인수(印綏)를 하사하였다.”AD 57년에 국제공인...
21/08/2025

“광무제 중원 2년(AD 57)에 왜의 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조하하였다. 왜의 사신은 대부를 자칭하였다. (노국은) 왜국에서 가장 남쪽의 나라이다. 광무제는 사신에게 인수(印綏)를 하사하였다.”

AD 57년에 국제공인을 받은 ‘왜(倭)’ 용어의 탄생과 관련해 이런저런 해석이 난마처럼 복잡하다. 왜라는 글자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것도 혼란을 부추긴 요인이다. 왜는 일본열도라는 ‘땅’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곳에 거주하는 ‘족속명’으로도 사용되었다. 또 열도에서 일어난 정치세력의 국명으로도 쓰였다. 중층적 의미로 사용된 왜의 유래를 추적하기는 안갯속처럼 막막해 보인다.

‘왜’라는 족속명의 탄생 ② - 종족명 왜의 출현과 한반도왜

https://blog.naver.com/sansuyabooks/223977023373

명나라에 유입된 은은 크게 두 갈래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조정에서 세금으로 거두어 국방과 외교를 국가 재정 수단으로 쓰였고, 다른 하나는 민간에서 화폐로 기능하며 상품유통을 확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덕분에 중국 ...
18/08/2025

명나라에 유입된 은은 크게 두 갈래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조정에서 세금으로 거두어 국방과 외교를 국가 재정 수단으로 쓰였고, 다른 하나는 민간에서 화폐로 기능하며 상품유통을 확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덕분에 중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여진(만주)족과 몽골 사회도 16세기 접어들면서 은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16세기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최대 은 수출국이고 중국은 최대 유입국이다. 몽골과 여진도 일찌감치 은 경제권에 포함되었다. 동아시아 전역이 은의 물결을 받아들이던 시점이지만 상업을 억눌렀던 조선은 그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이후에야 은이 소량 유통되기 시작했다.

여진족 사회에는 ‘외교’와 ‘상품유통’이라는 2개 경로 모두를 통해 중원의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었고 심대한 사회 변화를 유발하였다. 우선 국방, 외교비용을 따져보자. 중국이 벌어들인 은의 80% 이상이 북방의 군비와 이민족을 달래기 위한 외교비용으로 들어갔다는 분석이 있다. 1567~1572년의 경우 명나라의 연간 군비는 230만 냥이었지만 16세기 말이 되면 서북의 군대 주둔지에 보내는 은만 해도 연간 400만 냥을 넘어섰다. 각 부대는 주변의 농민들과 상인들에게 은을 주고 곡물과 직물 등 군수품을 조달하였다.

은의 유입과 여진사회의 변화 ① -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https://blog.naver.com/sansuyabooks/223971402424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일본 전역에서는 전선 건조와 징집령으로 대소란이 일었다. 나고야에 침공기지를 건설하였고, 부산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대마도에서 15만 명의 군대와 수천 척의 병선이 수일 동안 대기하였다. ...
17/08/2025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일본 전역에서는 전선 건조와 징집령으로 대소란이 일었다. 나고야에 침공기지를 건설하였고, 부산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대마도에서 15만 명의 군대와 수천 척의 병선이 수일 동안 대기하였다. 그런데도 조선 땅에서는 아무도 이를 몰랐다. 아무리 전통시대라고 하지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반대로 조선군이 바다를 건너 일본 본토를 공격하려 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일본의 눈을 속이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일본은 당신 조선의 정세를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조선 땅에는 수천 명의 일본 거류민이 체류하고 있었고, 일본의 어선들은 수시로 조선의 바다로 몰려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정보의 빈곤’ 바다를 버린 대가 ① - 7년전쟁, 임진왜란의 재구성

https://blog.naver.com/sansuyabooks/223971378945

인조 1년(1623년) 3월 20일자 실록에 “간원이 아뢰기를 전 통제사 원수신, 전 병사 권여경 (광해군 후궁의 부친) 등이 이미 체직되었으나 미처 교대하지 못하여 아직까지 병권을 쥐고 있으니 몹시 부당합니다. 잡...
13/08/2025

인조 1년(1623년) 3월 20일자 실록에 “간원이 아뢰기를 전 통제사 원수신, 전 병사 권여경 (광해군 후궁의 부친) 등이 이미 체직되었으나 미처 교대하지 못하여 아직까지 병권을 쥐고 있으니 몹시 부당합니다. 잡아다 국문하소서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반정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병권(兵權)은 한동안 광해군 계열의 인물들이 그대로 쥐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인조반정의 패자, 원수신 통제사 -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

https://blog.naver.com/sansuyabooks/223969227302

Address

Seoul

Telephone

+821053812657

Website

Alerts

Be the first to know and let us send you an email when 역사원정대 posts news and promotions.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used for any other purpose, and you can unsubscribe at any time.

Contact The Business

Send a message to 역사원정대:

Share

Categ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