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8/2025
#이피세
여기 있는 글들은 (-) DNA가 읽히길 기다리며 땅속 깊이 묻혀 있는 공룡들의 화석일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은 발굴자 없이는 그 누구도 읽을 수 없다.
🧸
나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가끔씩 내 손이 나의 뇌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지, 아니면 저절로 움직이는지 헷갈릴 때가 많다. 손이 가는 대로 그린다고 생각할 때가 더 많은데, 나의 뇌가 이때까지 손이 그린 것을 손에게 지워버리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을 보면, 나의 뇌는 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끼라를 쓰다듬어온 손 말이다. 아니면 새의 뇌처럼 나의 뇌가 다른 사람의 뇌와는 다른 구조를 가진 건 아닐까? 내가 그리는 것들은 마치 끼라처럼 살아 있지도 않고 죽어 있지도 않다. 미술의 사물들은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다.
부은 몸으로 힘겹게 의자 위에 앉아 있는 할머니, 화분에서 살아 있는 꽃을 뽑아버리는 여자, 커튼 속에서 숨죽이고 내다보는 사람들, 등에 이빨이 가득 솟은 종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생물들, 그 순간을 영원히 살고 있으나 그 순간이 영원하기 때문에 죽어 있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의 미술적 사물들, 오브제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주 얇은 막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 연필과 붓은 그 간극을 따라간다. 마치 어린아이가 손을 그려오라는 미술 숙제를 받았을 때, 자기 손에 연필을 대고 따라 그리는 것처럼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얇은 막에 붓을 대고 따라 그린다. 관람객들이 내 그림을 보고 뭘 그린 것이냐고 물으면 당황할 때가 많다. 어떤 평론가는 나에게 일기는 일기장에 쓰라고 일갈했는데 내 그림은 일기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작품은 나의 일상이라는 현실을 딛고, 변용되고, 환기되어 공동체를 향해 약진하는 게 아닌가.
가끔 나는 내가 그린 것들을 침구 밑 그 바다에 풀어준다. 그러면 그것들은 몸을 입고 바다 저 밑으로 가라앉는다. 끼라와 나는 오랫동안 내려다본다. 그것들은 살아 있다고도 죽었다고도 할 수 없다. 가끔 나는 그 밑에서 장대에 물건들을 매달아놓고 팔던 서울 변두리의 가게, 밤새 내린 눈이 썩어가는 듯하던 거리, 냄새나는 버스, 끼라의 목도리를 풀던 아파트의 거실, 너무 작아서 팔을 뻗으면 화장실과 부엌을 만질 수 있을 것 같던 그리운 그 거실을 본다. 그 장소들은 내 기억 속에, 엄마의 기억 속에, 끼라의 솜털 속에 살아 있으나 더이상 살아 있지 않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다. 나는 다시 그 바닷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그런 상태의 ‘생사물生死物’들을 건져올리고 또 풀어준다. 참고로 말하면 최근에 풀어준 것은 검게 탄 여자다. 그 여자의 몸에 비늘들을 가득 붙여주고 놓아준다. 나는 그것을 또 그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