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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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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의 빨대'그날 그곳에 그 운이 있었다. 늦은 오후 꽃이 핀 길을 걸어서가 아니다. 나보다, 꽃보다 먼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꽃을 본 나’는 그날, 그곳, 그 사건에서 현실이 됐다. 그 운은 ‘나’...
16/09/2025

✍️'미완성의 빨대'

그날 그곳에 그 운이 있었다. 늦은 오후 꽃이 핀 길을 걸어서가 아니다. 나보다, 꽃보다 먼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꽃을 본 나’는 그날, 그곳, 그 사건에서 현실이 됐다. 그 운은 ‘나’와 ‘꽃’을 만들었다. 늘 흐르는 강물 속 투명한 ‘이어짐’도 그곳에서 기다렸다. ‘헤엄치는 물고기를 본 나’는 그날, 그곳, 그 사건으로부터 ‘나’였다. 돌다리를 걸어서가 아니라, 튀어 올라서가 아니다. ‘나’와 ‘물고기’는 그 운에서 갈라 나왔다. 그 이어짐은 감춰진 채로 무거웠다.

어쩌면 운명이다. 그러나 나의 ‘열려있는 운명’은 원인과 결과, 뒤집힌 결과와 원인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흙탕물의 돌덩이처럼 보이지 않는 고단함을 구르는 삶, 둔탁한 소리로 둥글어지다 모래로 흩어지는 인과적 삶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삶을 사랑하라’는 격언에서 자신을 지워내고 해방을 꿈꾸는 절박함도 아니다. 이것은 삶에서 만나는 수많은 엇갈림에 대한 사랑이다.

다시 그날, 그곳, 그 사건이 먼저다. 그리고 ‘운’이라 이름을 붙인다. 마치 ‘미완성의 빨대’와 같다. 입구와 출구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그 ‘연결’은 이미 그곳에 있다. 그날 무작위로 집어 든 빨대의 한쪽을 입에 무는 순간 작은 불꽃이 일어나 의미들이 생겨난다. 그 순간의 우발적 선택에서 빨대의 입구와 출구, 방향까지 모든 것이 결정 난다. 한쪽에서 다른 쪽을 드러내고, 한쪽이 있어야 다른 쪽이 있다. 무엇도 아니었지만 무엇들은 이어져 있었고, 한순간 선택이 모든 걸 짙게 잇는다. 세상은 무수한 잠재적 이어짐의 장이고, 그날 그곳의 사건이란 운으로 피어난다.

나와 너는 따로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잇는 ‘연결’이 먼저 있었고 ‘나’를 결정짓는 태초의 순간에 ‘너’는 그곳에 너로서 존재했다. 그 사건으로부터 나는 나의 삶을 살고, 나의 너는 너의 삶으로 세상에 있다. 그리고 그날, 그곳, 그 사건이 우리가 현실에서 만난 순간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운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세상은 상상처럼 아름답지 않다.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감내하고 싶지도 않다. 나에게는 그것을 말할 자격이 없다. 만약 그럼에도 운이 정말 나의 말과 같다면, 삶에서 벌어지는 연속된 과정들의 놀이라면, 운은 남겨진 이에게 너무 버겁다.

✍ '메모'쌓아둔 메모들을 뒤적여 내키지 않는 생각들과 허황된 생각들을 밀어내고 쓸만한 문장들을 옮겨 적었다. 풀리지 않는 ‘우발성’이나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를 끄적였던 글에서도 골라냈다. 이 문장들은 ‘사람은 ...
06/08/2025

✍ '메모'

쌓아둔 메모들을 뒤적여 내키지 않는 생각들과 허황된 생각들을 밀어내고 쓸만한 문장들을 옮겨 적었다. 풀리지 않는 ‘우발성’이나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를 끄적였던 글에서도 골라냈다. 이 문장들은 ‘사람은 말 또는 생각과 행동을 구분한다’고 정리됐다. 생각, 즉 정신은 육체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세상은 온갖 범죄로 물들어갈 것이다. 절대적 지위를 잃은 정신은 육체와 같은 선 위로 올라야 했다.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하나인 것처럼 움직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이르러 수학자로 잘 알려진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모나드(monad)’가 떠올랐다. 그의 거대한 조화로 이 문제를 이해하려 했다. 문도 창문도 없는 공간에서 서로에 대해 알 수 없지만,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동시에 작동하기 때문에 하나의 움직임처럼 보인다고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나의 시도는 내가 가진 문제를 더 복잡하게 꼬았다. 나는 나의 시대에서 이해해야 했다. 그렇게 현대 의학의 개념을 이 문제 앞으로 끌고 왔다. ‘뇌는 신경세포와 화학물질의 상호작용을 통해 작동한다.’ 이 이해를 바탕으로 정신을 뇌의 활동이 ‘나’에게 나타나는, ‘나’만 경험할 수 있는 신체 활동으로 정의했다. 이 말에서 ‘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나 자신 그 자체를 말한다.

결과적으로 내가 특별한 결론에 이른 것은 아니다. 정신과 육체가 별개의 실체라는 전통적 관점의 ‘심신 이원론’이 내 안에서 무너졌고, 현대적인 ‘물리주의적 관점’으로 대체됐다. 생각은 뇌라는 신체 기관의 활동이다. 두 다리가 걸음으로, 위가 소화로 활동하듯 뇌의 활동은 생각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사람의 신체 기관은 물리적으로 관찰할 수 있고, 뇌 역시 특수 장비로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뇌는 한 가지가 다르다. 뇌는 주관적인 경험을 가진다. 내 팔의 움직임이 내 눈에 보이듯, 나는 뇌의 활동을 주관적으로 경험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생각하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내 생각이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반박했지만, 뇌 또한 나의 신체 기관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다. 뇌가 내 팔 근육에 신호를 보내 움직인다고 해서 내 팔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또한 앞에서 고민했던 질문도 사라졌다. 정신과 육체의 움직임은 나의 신체 활동이기 때문에 조화롭다.

이제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도 다른 방식으로 이해됐다. 한 손은 동그라미를, 다른 손은 네모를 그릴 때 양손의 움직임이 엉키듯 뇌와 다른 신체 기관은 엉킬 수 있다. 춤을 출 때 내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는 뇌와 다른 신체 기관이 적절한 신호를 주고받지 못할 수 있다. 신체 기관은 운동으로 단련되듯 뇌도 단련할 수 있다. 연습을 통해 다른 신체 기관과 더 강하게 연결될 수 있다. 또한 뇌도 다른 신체 기관처럼 헛발질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속일 수 있다.

물리주의적 관점은 모든 것을 물리적으로 환원하려 시도한다. 이 점은 달갑지 않다. 물리적 사실만으로는 내가 경험한 의미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 다른 이야기지만, 존 로크에 대해 읽으며 얻은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이란 개념이 이쯤에서 들어왔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또 더 나아갔다. 한 보따리 안에 설탕, 얼음, 나무막대를 집어넣는다고 아이스크림이 아닌 것처럼 사람은 물리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구성한다’라는 길로 들어갔다.

나는 안갯속에 있다. 그리고 이 안에 우발성이란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질문의 조건나는 나를 자주 흔들었다. 절망으로 모는 것이 버릇이었다. ‘정말 고통이다.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는 세상에 계속 살 이유는 뭘까?’ 나는 모자란 병에 걸렸고 마음 안에 비를 그렸다. 삶의 고고한 믿음...
01/07/2025

✍질문의 조건

나는 나를 자주 흔들었다. 절망으로 모는 것이 버릇이었다. ‘정말 고통이다.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는 세상에 계속 살 이유는 뭘까?’ 나는 모자란 병에 걸렸고 마음 안에 비를 그렸다. 삶의 고고한 믿음이 나에겐 없었다. 시간에 경계가 없었고, 아침의 잠결이었다. ‘왜 아무것도 없다면서 고통만 생생할까? 모든 것이 허무하다면서 왜 고통은 허무하다고 말하지 않을까? 왜 고통만 남겨둘까?’ 세상만사가 허무한 것이 사실이라면 고통도 똑같아야 했다. 그런데 나는 늘 아팠다. 모순이었다. 고통의 진짜 원인이 잊혀 있었다.

나는 동경할 줄 안다. 타인의 삶을 보며 빛나는 나의 삶을 바란다. 하지만 별은 너무나 멀다. 가지지 못할 것 같다. 가슴이 답답하다. 아니, 내 삶이 가치가 없다면 저 삶도 가치가 없다. 내 삶만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은 헛것이다. 왜? 이토록 힘들까? 고통받고 싶지 않다.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은 껍데기다. 세상에 추구해야 할 목적은 없다. 세상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탐욕스러워서 고통스러운 거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고통스러운 허상 속에서 계속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이토록 동경했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떤 영웅일까. 생과 죽음을 천칭에 올린 세월이 긴 만큼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무엇으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확신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나를 속여왔다. 내 삶의 덩어리에서 고통만 내 것이라 믿었다. 덩그러니 떠다니던 고통은 세상과 한데 묶였다. 상실되어 가는 수많은 세상의 의미와 가치만큼 고통의 무게도 커졌다. 어디에도 의미와 목적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오래도록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도 없었다.

나의 고통은 이제 다른 곳에서 보인다. 변했다. 세상과 나의 고통, 둘 사이가 완전히 갈라졌다. 세상이 허무해서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은 더이상 이해되지 않는다. 이렇게해서 살아있는 것이 완전한 나의 전제조건이 됐다. 내 질문의 조건이다.

✍'향수'사진을 찍다 보면 나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있다. 왜 나는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게 됐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살아온 시간을 전부 돌아봐야 해서 하나의 이유를 콕 집어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왜 하필 사진...
22/04/2025

✍'향수'

사진을 찍다 보면 나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있다. 왜 나는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게 됐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살아온 시간을 전부 돌아봐야 해서 하나의 이유를 콕 집어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왜 하필 사진일까라는 질문에 집중하면 그 관심이 전혀 생뚱맞은 것은 아니다.

대학교에 다녔던 20대의 나는 틈틈이 인사동과 예술의 전당으로 전시를 보러 다녔다. 시간과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많이 다니지는 않았지만, 보고 싶은 전시는 어떻게든 찾아갔다. 그때의 ‘나’는 파일 안에 보관하고 있는 그때의 티켓으로 남아있다.

교양 과목으로 들었던 서양미술사에 대한 기억도 선명하다. 내 기억으로는 그 강의를 세 학기 동안 들었다. 첫 번째는 교양 점수를 채우기 위해 들었고, 두 번째는 수강하는 친구들을 따라가서 도강(?)했고, 세 번째는 혼자서 도강(?)했다. 교수님도 나를 알았다. 그때의 근거 없는 열정을 돌아보면 얼굴이 붉어진다.

‘나도 미술을 하고 싶다’는 그때의 아쉬움이 시간이 흘러 ‘사진을 찍는 것’으로 나타난 것 같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사진에 비현실적인 면이 뚜렷해졌으리라. ’나’는 모양은 바뀌지만 변하지 않은 무언가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 옛날 광고의 말처럼 ‘언젠가 내가 서서 웃게 될 자리가 꼭 내가 시작한 곳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재발화'단순화하면 권력은 권리를 원한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정부가 어떻게 주권을 차지하게 되는지 설명한다. ‘…군주는 바로 이런 의무를 아주 유리하게 이용해 인민의 뜻에 반해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인민...
06/04/2025

✍'재발화'

단순화하면 권력은 권리를 원한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정부가 어떻게 주권을 차지하게 되는지 설명한다. ‘…군주는 바로 이런 의무를 아주 유리하게 이용해 인민의 뜻에 반해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인민의 권력을 찬탈했다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군주는 인민이 침묵을 깨뜨리지 못하게 이용하거나 군주가 범한 불법 행위가 두려워 침묵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단정하고, 용기 있게 말하는 사람들을 처벌한다. …바로 이런 단순한 방법을 통해 세상의 모든 정부는 공적 권력을 한번 부여받으면 조만간 주권을 찬탈한다.’

루소는 정부로부터 주권을 지키기 위해 정기집회를 주장했다. 그리고 집회에서 특정 안건을 투표에 부쳐 인민의 손으로 정부를 감시하고 통제하도록 했다.

‘첫 번째 안건. 주권자는 현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기를 원하는가?’

‘두 번째 안건. 인민은 현재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행정을 맡기기를 원하는가?’

이러한 인민의 직접적인 주권행사는 이성에 호소하며 설득력 있다. 그러나 루소는 ‘국가에서 폐지할 수 없는 기본법이란 없고, 심지어 사회계약까지도 폐지할 수 있음’을 전제했다. 이로써 투표에 부쳐진 안건은 현 정치 체제 존속에 의문을 불러오고 개헌 가능성을 기대하도록 한다. 그 급진성은 ‘주권자’, ‘인민’을 또 다른 ‘권력’으로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루소는 한쪽에는 ‘군주’를, 다른 한쪽에는 ‘인민’을 두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튼튼한 성안의 인민’이 모든 것을 심판하는 최고 결정자다.

오늘날 나의 시점에서 루소는 비판의 대상이다. 그러나 루소의 이론은 이 글의 근거이기도 하다. 또 사회계약론이 가진 급진성은 나에게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향수를 불러온다. 그곳은 조화가 필요하다. 이로부터 루소의 이론은 나의 말로 탈바꿈한다.

이제 정기집회의 기능보다 폭력 사태에 대한 우려가 우선시된다. 또 국가의 경기 침체 극복과 우발성에 대한 인정, 즉 더 나은 삶과 안정 추구가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그러나 권력의 부패 견제와 주권자의 위치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권력이 함부로 권리를 확장하지 못하도록 사회에 호소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의 두 질문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질문. 우리 지역의 행정권 수탁자들은 군민의 대리인으로서 충실한가?

두 번째 질문. 우리 지역은 공공의 안녕을 구실로 한 사적 권력 질서 재건에 참여하는 것은 아닌가?

루소가 투표에 부치고자 했던 안건에서 볼 수 있는 정치 체제의 변혁 가능성은 아직 이르다. 그 급진성은 더 많은 논의를 거쳐야 한다. 나의 글에 대한 나의 수정은 그 가능성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말일 것이다.

✍ '생명'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숨 하나가 어긋났을 뿐이었다. 일상의 공간이 평면과 구면, 구면과 쌍곡면, 다시 평면으로 어지럽게 휘었다. 그 곡률에 따라 숨의 기록이 비틀리고 늘어졌다. 숨을 쉬어야 했다. ...
24/12/2024

✍ '생명'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숨 하나가 어긋났을 뿐이었다. 일상의 공간이 평면과 구면, 구면과 쌍곡면, 다시 평면으로 어지럽게 휘었다. 그 곡률에 따라 숨의 기록이 비틀리고 늘어졌다. 숨을 쉬어야 했다. 한 번, 올바른 숨을 쉬었지만 어긋났기 때문에 실패. 두 번, 올바른 숨이었기 때문에 실패. 세 번, 어긋난 숨이었거나 또는 어긋난 숨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나는 문명 물질들을 조회하고 응답 없는 가치들을 모조리 삭제했다. 정신의 갈망이 끔찍했다. 살아있음을 향한 모든 질문을 불태웠을 때 드디어 완전한 숨을 찾을 수 있었다. 생명이었다. 이것이 ‘살아있음’이 명이 된 사건이다.

나는 선택 없이 탄생했다. 그 이유와 목적은 언제나 물음이다. 이미 나의 공간에 그 이유와 목적이 자리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살아있음에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프로타고라스는 ‘나는 신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혹은 모습이 어떤지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들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얻지 못하는, 주제가 모호하다든지 인생이 짧다는 여러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옳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 말에 ‘사람의 인식 능력’에 대한 의심이 없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사람은 신을 볼 수 있을까? 있어도 모르고, 없어도 모르는 것 아닐까?

나의 살아있음은 선택할 수 없으므로 나를 넘어서 있다. 강제성을 띤다. 신을 향한 사람의 인식을 의심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살아있음’을 향한 앎의 가능성도 의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유와 목적이 있어도 모르고 없어도 모르는 것 아닐까? 그 이유와 목적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살아있음’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를 넘어서 있으며 강제성을 띤 것은 ‘명’이 아닐까? 나는 벅참과 억울함의 소멸, 모든 의미의 소멸을 품에 끌어안았다.

이 시점부터 나의 물음들은 명으로부터 출발하고 실천을 향한다. ‘실천’이 근본적 물음이 되어간다.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할 것이며, 왜 했고, 왜 하는 중인가에 관한 물음으로 반환되고 있다. 꿈을 향한 물음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무엇도 되기 싫은 사람'이 순간, 여기에서 질문은 명령어가 아니다. 마침표가 없는 명령어는 작동하지 않는다. 존재가 물어지는 것들, 그리고 나는 작동하지 않는다. 일상은 보통의 마침표가 먼저 오고 물음이 뒤따른다...
14/10/2024

✍'무엇도 되기 싫은 사람'

이 순간, 여기에서 질문은 명령어가 아니다. 마침표가 없는 명령어는 작동하지 않는다. 존재가 물어지는 것들, 그리고 나는 작동하지 않는다. 일상은 보통의 마침표가 먼저 오고 물음이 뒤따른다. 이곳으로부터 숨과 발견이 없고 죽은 물음표의 바늘은 삭제된다. 왜. 무엇으로서 점이 강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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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 '사랑에 대해' '하느님이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할 때는 우리가 그냥 행복한 망상 속에서 춤추게 놔둘 때다.' 먼 옛날 신들은 필연에 복종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우주에 어울리는 소나기는 숙명만 알고 있다. 모든...
22/08/2024

✍ '사랑에 대해'

'하느님이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할 때는 우리가 그냥 행복한 망상 속에서 춤추게 놔둘 때다.'

먼 옛날 신들은 필연에 복종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우주에 어울리는 소나기는 숙명만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완고한 운명의 지배를 받고, 어느 것 하나 넘치는 것 없이 조화를 이룬다. 오만은 응징되고 질서는 회복된다. 나와 당신, 이 세상은 그 질서 안에 존재한다. 그런데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적들을 처치하고 차지하는 왕관의 빛에 사랑이 있을까. 아니, 그럴 리 없다. 적으로 죽어가던 한 연인의 사랑도 정량은 없다. 그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의 사랑이 그보다 가벼울 수 없다. 결국 최고 사랑의 조건은 무엇인가. 이곳에 사랑은 설 곳이 없다.

프로타고라스는 옳다. 각각은 사랑의 척도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사랑’이다. 나의 사랑이 아름답다면, 그들의 사랑도 찬란하다. 모든 곳에 사랑이 넘친다. 그래서 ‘사랑’은 그만 그 모습을 감춘다. 메말라가던 진정한 의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전쟁의 삭막함이 이곳의 전부다. 사랑 속에서 무엇이 ‘사랑’일까. 사랑은 이곳에도 없다. 정확하게 다시 말하면, 그래서 사랑은 나의 논리 안에서 찾을 수 없다.

기대가 된 곳은 ‘감각’이다. 사랑이었다고 여전히 말하는 나의 느낌, 나의 반성이다. 그러나 사랑은 여기서도 정의될 수 없다. 그 느낌이 정말 사랑으로부터 온 것일까. ‘진짜 사랑’을 구별할 수 있을까. 나는 무기력하게 바다 위에 떠 있다. 이 섬에서 무엇을 발견하든 누군가가 탐낼만한 보물은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골머리를 앓았다. 깊은 늪으로 나 스스로 빠져갔다. 결국 여기서 가질 수 있는 태도는 하나뿐인듯하다. 나의 공상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듯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포함하는 ‘모두의 사랑’에서 믿을만한 ‘보편적 사랑’을 추상할 수 있다. 이끌어 낼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신의 심판대에 올릴 것이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묻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신의 동의를 구한다. 반대하거나 응답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한계를 경계 지을 것이다. 결국 인정한다면 ‘나는 동의만 구했을 뿐 신의 사랑과 나의 사랑이 정확히 똑같은지, 일부만 포함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것은 여전히 나의 사랑일 뿐이다’라고 우길 것이다.

비열한 짓이다. 모호함 속 억지인 것을 안다. 그러나 더 이상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나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 사랑에 대한 용기와 자신감이다. 드디어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

모든 사랑을 인정할 때는 해명해야 할 물음들이 있다. 일부만 짚어본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 문제는 “그 대상을 향한 사랑이 가능한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관계 속에서 그 사랑의 행위는 정당한가?” 또는 “그 사랑의 행위를 사회적으로 다뤄야 하는가?”가 문제인 것 같다. 두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짧은 의견이 있지만, 지금은 어울리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면 어떤 ‘개념’이든 우리의 논의 주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돌아가서 사랑은 반드시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생각될 수 있어야 하므로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표현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뿐이다. 사랑은 정확한 실체를 바라지 않는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데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랑은 균형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느 날의 햇볕이, 늘 그 자리에 있던 꽃이, 야생의 동물들이, 상상 속 무언가가, 어떤 이들에 의해서는 지혜가 사랑받는다. ‘저곳에 나로서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는데, 나는 그 ‘알 수 없음’을 기억한다’는 주장을 사랑은 포함한다. 사랑은 그 ‘알 수 없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 ‘알 수 없음’에서 사랑은 언제든 무엇을 새롭게 발견한다. 그러나 새로운 발견은 그 대상을 변화시킨다. 이제 사랑은 시험대에 오르고 두 가지 갈림길에 선다. 하나는 대상의 같은 곳만 보며 언제나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단절된 상태일 리 없기 때문에 자신도 늘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발견의 매 순간 순간마다 ‘또 다른 사랑’을 키워내는 것이다. 그 흐름에 따라 마치 생명의 운동처럼 성장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자신도 변해가는 것이다.

사랑이 왜 이렇게 복잡해야 할까. 나로서는 시간이 원인인 것 같다. 과거에 죽었고, 현재에 죽어있고, 미래에 죽어 있을 것인 한 사람의 발견 없는 영원한 죽음과 사랑은 다르다. 사랑은 시간 속에서 추억이자 약속이 된다. 그래서 사랑은 멈추지 않는 과정이고, 그 변화의 힘은 시간이다. 사랑은 시간에 무력한 것 같다.

이제 비가 그쳤다. 나의 말은 말라서 모두 하늘로 흩어졌다.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 그중에서 플라톤에 관한 것들이 나의 항해 지도였다. 끝으로 희망이 있는 곳, 그곳은 사랑이 발견해 낸다. 여기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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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

✍'변화와 진화'자가당착은 예상치 못한 방향을 가져왔다. ‘원하든 원치 않든 변화는 일어난다’는 모순이었다. 주장은 자기반성적 질문으로 의미가 상실됐다. ‘무조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면, 그 주장 자체에도 적용돼야...
29/04/2024

✍'변화와 진화'

자가당착은 예상치 못한 방향을 가져왔다. ‘원하든 원치 않든 변화는 일어난다’는 모순이었다. 주장은 자기반성적 질문으로 의미가 상실됐다. ‘무조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면, 그 주장 자체에도 적용돼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말이 계속 달라지면, 의미도 계속 달라지지 않을까?’ ‘고수할 수 없는 주장은 그 가치를 잃은 것 아닐까?’

끝이 없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기반성을 피하려 말을 바꾸면 ‘원하든 원치 않든 변화는 일어난다’를 증명하는 꼴이었다. 희한하게도 이 주장을 잡아둘 수 없었다. 마음에 들었지만 살아있듯 움직이는 탓에 나의 말로는 가리킬 수 없었다. 그런데 틀렸다는 확신도 없었다. 오묘한 곳에 갇혔는데, 감옥은 아니었다. 선택할 수 있지만, 선택하지 않은 것도 선택됐다. 존재가 증명된 주장은 자신 안에서 자신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가 옳기 때문에 다른 말이 됐고, 자신을 벗어난 곳에서 자신을 되찾으려 했다.

진지한 고민이었다. 그러나 말장난이었다. 아무것도 없다. 주장을 고쳐도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처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처음’을 모르는 상태라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그 처음’이 될 수 있을까. 질문은 기억 어딘가로 향했다.

일상생활에서 사람은 어떤 한계에 부딪히지 않을까. 그때 사람은 좀 더 사회화되거나 세상의 어떤 가치들을 받아들여 그 상황, 그 압박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을까. 나 홀로 감당해야 하는 극단적 한계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 벽을 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한계를 가정하고 해결할 방법을 찾지 않을까. 그런데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 자체로 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신이 제시하는 모든 고난과 혹독한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일까. ‘영웅’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나’의 과거와 미래, ‘나’의 모든 것을 양분 삼아 탄생한 그는 누구일까. ‘나’의 그림자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넘은 저 벽 뒤에서 환영하는 이는 누구일까. 그 자리에서 지치지 않고 기다려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나’ 아닐까. 하지만 돌아온 집은 종점이 아니지 않을까. 이제부터 ‘나’는 어디를 향해 가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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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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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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