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2/2023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난 25일, 5.18 당시 YWCA 사회문제부 간사로서 광주항쟁을 주도한 여성 중 한 분이셨던 이윤정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 전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전에 고인을 뵐 기회를 몇 차례 가졌습니다. 첫 만남은 의 저자 전용호 선생님과 현 5.18 진상조사위 부위원장이신 안종철 박사님이 주선한 자리였습니다. 그날 이윤정 선생님께 5.18을 포함한 당신의 생애사를 들었습니다.
1955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나 전남여중, 전남여고를 졸업한 고인은 동부교회 백영흠 목사를 통해 사회운동과 연을 맺게 됩니다. 백영흠 목사는 광주 YMCA 초대 재단 이사장이었고, 1980년 5월 26일 계엄군의 광주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지역인사들이 진행한 '죽음의 행진' 참가자였습니다.
1978년 11월 광주·전남의 여성 활동가들이 고인의 표현에 따르면 '최초의 민주여성단체'인 송백회를 조직합니다. 송백회에는 교사, 간호사, 노동자, 주부, 청년운동가 등 진보적 사회의식을 가진 여성들과 민청학련 구속자 가족, 민주화운동 활동가 부인 등 약 8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고인도 함께였습니다. 송백회는 농협의 고구마 수매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함평 고구마 사건 당시 광주에서의 저항(그러니까 단식 농성과 YWCA에서 북동성당까지 이어진 가두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80년 3월, 이윤정은 YWCA 사회문제부 간사가 되었습니다. 5.18 마지막 수배자인 합수 윤한봉 선생의 추천이 있었습니다. 직접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당시 YWCA 사회문제부는 여성 노동운동가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는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만연해 있었고, 노동3권은 당연한 듯 보장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민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해 활동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양강의를 시작으로 각종 교육을 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그날도 YWCA에서 강연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날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그날 강연은 긴장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강사의 말이 끝나고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때 창 밖에서 문득 트럭이 멈추는 듯, '끼이익' 소리가 들렸습니다. 곧 천막 쳐진 트럭에서 내린 군인들이 젊은 청년들을 목덜미 잡고 끌고 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YWCA에 있던 시민들은 계엄군에게 욕설 세례를 받은 후 불타는 마음을 안고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근처를 오가며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윤정 선생님은 그날 앞서 가던 시민 한 분이 곤봉을 맞고 쓰러지는 광경을 봤습니다. 그날부터 5.18에 참여했습니다. 곧 YWCA는 도청, YMCA와 더불어 시민들의 항쟁지도부가 됐습니다. 특히 홍보, 선전과 관련된 모든 일이 YWCA에서 이뤄졌습니다. 이곳의 등사기를 통해 인쇄된 인쇄물들이 시민들의 손을 타고 광주 전역에 파졌습니다.
'드디어 제1차 전남도민시국궐기 대회를 가지다!'
5월 23일(금) 오후 4시 도청 앞 광장에서 2만 여 도민이 참석한 가운데 시국에 대한 각계의 입장을 밝히고 구체적인 결의를 다짐했습니다.
보라! 그동안의 참혹한 만행을!
광주시민이여! 모두 참가 합시다.
이윤정 선생님은 5월 22일, 전남도청 구름다리 아래에 모여있던 시신들의 모습을 여전히, 잊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검게 변해 있던 시신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어린 나이였던 당시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시신에 대한 예우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곧 상무관에 합동 분향소가 마련됩니다. 송백회 회원들은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검은 리본을 제작했고, 염을 하는 등 장례일에 함께했습니다. 부상자를 파악하는 등의 실무도 하고 취사팀도 만들었습니다.
5월 26일,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매일 한 번씩 개최되던 게, 그날은 오전, 오후 두 번 열렸습니다. 시민들은 그날 오후 집회가 끝나고, 시내를 한 바퀴 돌며 결의를 다졌습니다. 이후 YWCA 강당에 모여 마지막을 준비했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역시나 수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안 된다며, 총을 내려놓고 후일을 기약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때 이윤정 선생님이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80년의 사북사태와 1919년 3.1운동 이야기를 하며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도청과 YWCA와 YMCA에 남자고 했습니다.
그날 Y 강당에서 진행된 이야기는 최후의 항전, 결사항쟁의 결의였습니다. 잠시 후 윤상원 열사가 Y 강당 회의 참석자들의 결의를 모아, 외신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진행했습니다. 해당 기자회견을 마치며 윤상원 열사는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억할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윤상원 열사는 다음 날 새벽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0년 5월 26일은 이 땅의 역사에서 가장 긴 밤이었습니다. 이윤정 선생님은 박용준 열사와 함께 YWCA에 남았습니다. 전남도청, YWCA, YMCA, 전일빌딩, 그곳들은 광주시민들의 최후의 항전지였습니다. 이윤정 선생님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모금된 돈 중에서 만 원, 이만 원을 꺼내 옆을 지키던 박용준 열사에게 건넸습니다. 당시 송백회 활동가들은 모금 일도 함께했습니다. 박용준 열사는 "누나, 나는 이거 필요없어요. 나는 오늘 밤에 죽을 건데.."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당시 박용준 열사는 유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도청 항쟁지도부에서 여성, 청소년투사들을 대피시키자는 결정이 있었습니다. 이윤정 선생님은 새벽 2시를 넘긴 직후 동료들과 함께 인근 교회로 피신했습니다. 잠시 후 계엄군은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수백 명의 시민들이 체포됐습니다. 전남도청에서 7명, YWCA에서 2명의 여성이 마지막까지 그곳들을 사수하던 중 체포됐습니다. 이윤정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낸 박용준 열사는 머리에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항쟁 직후 광주를 점령한 계엄군은 항쟁의 주도자들을 줄줄이 구속해 상무대로 끌고 갔습니다. 여성 활동가들은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직후부터 상무대와 광산서 유치장에서는 고문과 가혹행위가 이뤄졌습니다. YWCA 인사들 역시 줄줄이 구속됐습니다. 조아라 회장, 이애신 총무가 구속되었고 이윤정 간사는 전국에 지명수배되어 2년간 수배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이윤정은 늘 오월운동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고, 1991년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에는 오종렬, 안성례 의원과 함께 초대 광주광역시의원으로 당선돼 3대 재야의원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임기 만료를 앞두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게 되면서 임기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이후 고인은 민주당계 정당에 들어가 열린우리당 중앙위원(광주 여성위원장)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50대 후반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5.18 당사자가 사회가 정해둔 일반적 시각보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 박사학위까지 받은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윤정 선생님을 뵈었을 때, 선생님은 본인을 조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으로 소개했습니다.
선생님의 생애사를 듣기 전날에, 앞서 언급한 안종철 박사님이 선생님의 증언기록을 보내주셨는데, 그 문서의 이름은 '우리 여성도 항쟁지도부였다'였습니다. 제목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5.18의 '주체'였던 여성들이 과연 그 위상에 걸맞은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묘사하기도 두려운 방식으로 유명을 달리한 여성분들의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었지만 정작 항쟁의 주체였던 분들의 이야기는 많이 듣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의 주체였던 그들은 정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은폐된 이들이 되었습니다.
고인의 개명 전 이름은 이행자였습니다. 5.18 직후 신군부가 배포한 수배전단에 당당하게 광주 YWCA 이행자의 이름이 올라있습니다. 5.18 당시 마지막까지 싸우자고, 당당하게 목소리 냈던 고인을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 편히 쉬세요.
https://omn.kr/22v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