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 1980년 5월 광주를 함께 기억하고 싶은 당신을 위해.
(302)

5.18민중항쟁은 헌법을 유린하고 군사반란을 획책한 전두환 일당의 무도한 폭거에 맞서 이땅의 민주주의와 헌법의 존립 그리고 헌정질서 유지를 위해 생명을 걸고 싸운 민주화운동이다, 5.18정신은 내일의 올바름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이겨낸 것이다.

오늘은 무려 육군본부 정훈감을 지낸 예비역 준장 표명렬 장군을 인터뷰했습니다.1938년생인 표명렬 장군은 육사 18기(1958년) 출신으로 지난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는 이때 미군과 함께 작전을 ...
30/08/2023

오늘은 무려 육군본부 정훈감을 지낸 예비역 준장 표명렬 장군을 인터뷰했습니다.

1938년생인 표명렬 장군은 육사 18기(1958년) 출신으로 지난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는 이때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며 그들의 상하관계, 즉 군 문화를 몸소 겪었습니다. 당시 그가 본 미군은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지 않는 우리 군대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표 장군은 인간과 역사에 대해 그 어떤 개념도 갖지 않고 무기만 가진 군대여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평생을 정훈병과에서 보냈습니다. 그가 준장 시절 재직한 육군본부 정훈감은 우리 군의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정신전력'을 관리, 유지하는 보직입니다. 그는 육군본부 정훈감으로서 국군의 정신, 정통성, 이념, 철학 등 장교들이 가져야 하는 품성을 관리,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우리 군의 정통성은 항일무장투쟁 정신에 있다고 생각했고, 사관학교는 생도들이 국군의 사상, 철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군에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라'는 교육을 받고 장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 정의가 없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훈감으로 일하며 이런 것들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독립군, 광복군 인사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이 활동하던 서울 청량리의 허름한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육군에서 찾아 왔다는 소식에 독립유공자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후 표 장군은 그들을 육군본부 광장에 모셨습니다. 군악대 퍼레이드와 생도들의 사열을 바쳤고, 대한독립에 대한 연극을 만들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에게 이번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은 어떤 일이었을까요?

시골에서 나무 키우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는 노장, 표명렬 장군에게 이번 논란에 대한 생각을 물었습니다.

오늘은 5.18민주화운동을 새로운 시선으로 재해석한 공연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장소 이동형 오디오 공연 입니다. 이 공연의 관객은 스스로 가치탐험대가 되어 광주 충장로와 금남로를 걷습니다. 오디오 사운드를 들으며...
01/06/2023

오늘은 5.18민주화운동을 새로운 시선으로 재해석한 공연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장소 이동형 오디오 공연 입니다. 이 공연의 관객은 스스로 가치탐험대가 되어 광주 충장로와 금남로를 걷습니다. 오디오 사운드를 들으며, 가치 탐험을 의뢰한 콘크리트이자 5.18사적지 천변우로 415를 찾아갑니다.

이번 공연은 6월 17일, 18일, 24일, 25일에 진행됩니다.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댓글에 첨부했습니다.

2023년 5월 18일. 오늘은 5.18 민주화운동 43주년 기념일입니다. 다시 오월이 왔고, 그날이 왔습니다. 삼가, 이 땅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위해 먼저 가신 임들의 명복을 빕니다. 43년 전 오월 그날의...
18/05/2023

2023년 5월 18일. 오늘은 5.18 민주화운동 43주년 기념일입니다. 다시 오월이 왔고, 그날이 왔습니다. 삼가, 이 땅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위해 먼저 가신 임들의 명복을 빕니다. 43년 전 오월 그날의 희생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 | 본 글은 1980년 5·18 민중항쟁의 배경과 열흘 간의 항쟁, 해당 사건이 남긴 피해와 의의를 담고 있습니다. 길지만,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배경 2. 1980년 5월 ...

매년 오월이 되면 올해의 '들불상' 수상자가 선정됩니다. 이 상은 광주지역의 노동야학이었던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던 중 5.18을 전후로 세상을 떠난 들불7열사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습니다.오늘, 제18회 들...
16/05/2023

매년 오월이 되면 올해의 '들불상' 수상자가 선정됩니다. 이 상은 광주지역의 노동야학이었던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던 중 5.18을 전후로 세상을 떠난 들불7열사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습니다.

오늘, 제18회 들불상 수상자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선정됐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해 헌신해 온 이 모임은 양금덕 할머니 등 5명의 원고와 함께, 광주와 도쿄를 오가며 일본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해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현재도 2차, 3차 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들불상 시상식은 5.18의 마지막 날이었던 5월 27일에 맞춰, 오는 27일 5.18묘역에서 진행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지난 25일, 5.18 당시 YWCA 사회문제부 간사로서 광주항쟁을 주도한 여성 중 한 분이셨던 이윤정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 전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
27/02/2023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난 25일, 5.18 당시 YWCA 사회문제부 간사로서 광주항쟁을 주도한 여성 중 한 분이셨던 이윤정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 전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전에 고인을 뵐 기회를 몇 차례 가졌습니다. 첫 만남은 의 저자 전용호 선생님과 현 5.18 진상조사위 부위원장이신 안종철 박사님이 주선한 자리였습니다. 그날 이윤정 선생님께 5.18을 포함한 당신의 생애사를 들었습니다.

1955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나 전남여중, 전남여고를 졸업한 고인은 동부교회 백영흠 목사를 통해 사회운동과 연을 맺게 됩니다. 백영흠 목사는 광주 YMCA 초대 재단 이사장이었고, 1980년 5월 26일 계엄군의 광주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지역인사들이 진행한 '죽음의 행진' 참가자였습니다.

1978년 11월 광주·전남의 여성 활동가들이 고인의 표현에 따르면 '최초의 민주여성단체'인 송백회를 조직합니다. 송백회에는 교사, 간호사, 노동자, 주부, 청년운동가 등 진보적 사회의식을 가진 여성들과 민청학련 구속자 가족, 민주화운동 활동가 부인 등 약 8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고인도 함께였습니다. 송백회는 농협의 고구마 수매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함평 고구마 사건 당시 광주에서의 저항(그러니까 단식 농성과 YWCA에서 북동성당까지 이어진 가두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80년 3월, 이윤정은 YWCA 사회문제부 간사가 되었습니다. 5.18 마지막 수배자인 합수 윤한봉 선생의 추천이 있었습니다. 직접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당시 YWCA 사회문제부는 여성 노동운동가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는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만연해 있었고, 노동3권은 당연한 듯 보장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민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해 활동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양강의를 시작으로 각종 교육을 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그날도 YWCA에서 강연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날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그날 강연은 긴장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강사의 말이 끝나고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때 창 밖에서 문득 트럭이 멈추는 듯, '끼이익' 소리가 들렸습니다. 곧 천막 쳐진 트럭에서 내린 군인들이 젊은 청년들을 목덜미 잡고 끌고 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YWCA에 있던 시민들은 계엄군에게 욕설 세례를 받은 후 불타는 마음을 안고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근처를 오가며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윤정 선생님은 그날 앞서 가던 시민 한 분이 곤봉을 맞고 쓰러지는 광경을 봤습니다. 그날부터 5.18에 참여했습니다. 곧 YWCA는 도청, YMCA와 더불어 시민들의 항쟁지도부가 됐습니다. 특히 홍보, 선전과 관련된 모든 일이 YWCA에서 이뤄졌습니다. 이곳의 등사기를 통해 인쇄된 인쇄물들이 시민들의 손을 타고 광주 전역에 파졌습니다.



'드디어 제1차 전남도민시국궐기 대회를 가지다!'

5월 23일(금) 오후 4시 도청 앞 광장에서 2만 여 도민이 참석한 가운데 시국에 대한 각계의 입장을 밝히고 구체적인 결의를 다짐했습니다.

보라! 그동안의 참혹한 만행을!
광주시민이여! 모두 참가 합시다.



이윤정 선생님은 5월 22일, 전남도청 구름다리 아래에 모여있던 시신들의 모습을 여전히, 잊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검게 변해 있던 시신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어린 나이였던 당시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시신에 대한 예우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곧 상무관에 합동 분향소가 마련됩니다. 송백회 회원들은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검은 리본을 제작했고, 염을 하는 등 장례일에 함께했습니다. 부상자를 파악하는 등의 실무도 하고 취사팀도 만들었습니다.

5월 26일,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매일 한 번씩 개최되던 게, 그날은 오전, 오후 두 번 열렸습니다. 시민들은 그날 오후 집회가 끝나고, 시내를 한 바퀴 돌며 결의를 다졌습니다. 이후 YWCA 강당에 모여 마지막을 준비했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역시나 수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안 된다며, 총을 내려놓고 후일을 기약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때 이윤정 선생님이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80년의 사북사태와 1919년 3.1운동 이야기를 하며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도청과 YWCA와 YMCA에 남자고 했습니다.

그날 Y 강당에서 진행된 이야기는 최후의 항전, 결사항쟁의 결의였습니다. 잠시 후 윤상원 열사가 Y 강당 회의 참석자들의 결의를 모아, 외신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진행했습니다. 해당 기자회견을 마치며 윤상원 열사는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억할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윤상원 열사는 다음 날 새벽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0년 5월 26일은 이 땅의 역사에서 가장 긴 밤이었습니다. 이윤정 선생님은 박용준 열사와 함께 YWCA에 남았습니다. 전남도청, YWCA, YMCA, 전일빌딩, 그곳들은 광주시민들의 최후의 항전지였습니다. 이윤정 선생님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모금된 돈 중에서 만 원, 이만 원을 꺼내 옆을 지키던 박용준 열사에게 건넸습니다. 당시 송백회 활동가들은 모금 일도 함께했습니다. 박용준 열사는 "누나, 나는 이거 필요없어요. 나는 오늘 밤에 죽을 건데.."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당시 박용준 열사는 유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도청 항쟁지도부에서 여성, 청소년투사들을 대피시키자는 결정이 있었습니다. 이윤정 선생님은 새벽 2시를 넘긴 직후 동료들과 함께 인근 교회로 피신했습니다. 잠시 후 계엄군은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수백 명의 시민들이 체포됐습니다. 전남도청에서 7명, YWCA에서 2명의 여성이 마지막까지 그곳들을 사수하던 중 체포됐습니다. 이윤정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낸 박용준 열사는 머리에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항쟁 직후 광주를 점령한 계엄군은 항쟁의 주도자들을 줄줄이 구속해 상무대로 끌고 갔습니다. 여성 활동가들은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직후부터 상무대와 광산서 유치장에서는 고문과 가혹행위가 이뤄졌습니다. YWCA 인사들 역시 줄줄이 구속됐습니다. 조아라 회장, 이애신 총무가 구속되었고 이윤정 간사는 전국에 지명수배되어 2년간 수배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이윤정은 늘 오월운동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고, 1991년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에는 오종렬, 안성례 의원과 함께 초대 광주광역시의원으로 당선돼 3대 재야의원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임기 만료를 앞두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게 되면서 임기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이후 고인은 민주당계 정당에 들어가 열린우리당 중앙위원(광주 여성위원장)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50대 후반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5.18 당사자가 사회가 정해둔 일반적 시각보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 박사학위까지 받은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윤정 선생님을 뵈었을 때, 선생님은 본인을 조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으로 소개했습니다.

선생님의 생애사를 듣기 전날에, 앞서 언급한 안종철 박사님이 선생님의 증언기록을 보내주셨는데, 그 문서의 이름은 '우리 여성도 항쟁지도부였다'였습니다. 제목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5.18의 '주체'였던 여성들이 과연 그 위상에 걸맞은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묘사하기도 두려운 방식으로 유명을 달리한 여성분들의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었지만 정작 항쟁의 주체였던 분들의 이야기는 많이 듣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의 주체였던 그들은 정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은폐된 이들이 되었습니다.

고인의 개명 전 이름은 이행자였습니다. 5.18 직후 신군부가 배포한 수배전단에 당당하게 광주 YWCA 이행자의 이름이 올라있습니다. 5.18 당시 마지막까지 싸우자고, 당당하게 목소리 냈던 고인을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 편히 쉬세요.

https://omn.kr/22vla

어제 광주에서는 5.18 공법단체 두 곳이 특전사동지회와 함께 '화해와 감사' 대국민 공동선언을 강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비역 특전부대원 수백명이 5.18기념문화센터에 집결했습니다.5.18 부상자회와 공로자회는 ...
20/02/2023

어제 광주에서는 5.18 공법단체 두 곳이 특전사동지회와 함께 '화해와 감사' 대국민 공동선언을 강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비역 특전부대원 수백명이 5.18기념문화센터에 집결했습니다.

5.18 부상자회와 공로자회는 "5.18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민주주의에서 실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서도 "5.18 당시 현장에 투입된 계엄군은 상부의 명에 복종하는 것이 불가피했던 같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양측 모두 실행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양시론의 관점에서 5.18을 바라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5.18 공법단체 두 곳이 이 같은 행사를 주최하자 광주지역 시민사회노동단체 113곳은 이번 행사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한 후 5.18문화센터와 5.18묘역에서 '오월정신 지키기 범시민대회'를 진행했습니다. 이날 대한민국 특전사동지회 중앙회가 국립5.18민주묘역 정문에 게시한 '화해와 감사로 5.18정신 이어가자' 등의 현수막은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찢어졌습니다.

어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박기순 열사의 둘째 오빠이자 민청학련, 5.18 민주화운동을 관통한 활동가 출신 사업가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이 세상을 떠났습니다.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전해진 때 아닌 부음이 황망합...
25/12/2022

어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박기순 열사의 둘째 오빠이자 민청학련, 5.18 민주화운동을 관통한 활동가 출신 사업가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전해진 때 아닌 부음이 황망합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당시 스쿨버스에서 내려, 전남대 농대로 뛰어가 '유신독재 타도'를 외쳤던 그 젊은 열정 그대로 고인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헌신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추모글] 징역 10년 선고, 11개월 수감생활도

Address

Gwangju

Alerts

Be the first to know and let us send you an email when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 posts news and promotions.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used for any other purpose, and you can unsubscribe at any time.

Contact The Business

Send a message to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