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8/2025
ㅣ 필자 박기성은 (사)한국山書會 회장이다. 서울大 문리대OB산악회장으로 〈사람과 산〉 편집장을 지냈다. 저서로 「삼국사기의 산을 가다」, 「명산」, 「울릉도」가 있다.
금강산(金剛山 482.7m)은 해남의 진산(鎭山)이다. 정상 동쪽에 둘레 1087m의 포곡식(抱谷式) 산성이 있어 유사시 진산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 읍내에는 또 읍성이 있어 산성-읍성의 기각지세(掎角之勢)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고을이다. 이 금강산 이름은, 지금은 은적사로 이름이 바뀐 ‘미소 짓는 부처님’, 보물 철조비로자나불 좌상이 있는 절의 옛이름 금강사에서 유래했다.
해남은 동쪽의 만대산(萬臺山)과 우슬재 남쪽의 덕음산(德陰山), 돌고개~서당산~호산(葫山) 지나 남각산으로 어어지는 소쿠리 안통의 물이 서쪽으로 빠져나가니 예로부터 서림공원 숲을 가꿔 비보(裨補)를 해왔다. 울타리 남쪽으로는 두륜산과의 사이에 삼산천이 흐르고 북쪽에는 옥천면의 옥천이 돌아들며 바깥으로 가학산맥, 주작산맥, 두륜-병풍산맥이 결구배추처럼 에워싸서 고을 산세와 지세가 명당도(明堂圖)를 그리고 있는 땅이다.
금강산 정상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이 치마폭에 싸인 병아리마냥 들어온다. 두륜산 오른쪽으로 달마산도 보이고 그 서쪽으로는 남해 바다 수평선이 반공(半空)에 떠있다. 애창하는 노래 ‘떠나가는 배’처럼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가 보일 듯 말 듯 아스라하게.
두륜산 방향으로 ‘킬트 상보(床褓)’ 같은 야산과 마을, 전답이 보이면 저기가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의 녹우당(綠雨堂)이겠거니 짐작해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교과서에 나온 어부사시사와 산중신곡(山中新曲)을 지은 그는 별시문과(초시) 장원 급제자며 만석군 해남 윤씨의 상속자로서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던 위인이었다(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別試는 정규 과거인 式年試가 初試, 覆試, 殿試의 3단계였던 것과 달리 초시와 전시뿐이었고 급제자 수도 33인이 아니라 열 명 내외였다). 하지만 벼슬길에 나서기도 전인 성균관 유생 때(29세)부터 귀양살이를 시작, 만70세가 될 때까지 20여년을 유배지에서 보냈으니 결코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다 할 것이다.
고산이 보길도에 은거하게 된 계기는 병자호란이었다. 난리가 났다 하니 임금을 호종(扈從)하기 위해 수백 명의 가복(家僕)과 선단을 동원, 강화도로 향했는데 도중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다시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틀었는바 이번에는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고 도성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여 세상사에 뜻을 잃고 제주도를 찾아가다가 풍랑을 만나 발견한 보길도에서 여생을 마치기로 작정하였다.
보길도로 들어가는 우리 일행은 한국산서회 박동욱 고문과 홍하일·이대희 회원, 해남의 천기철 회원, 홍하일의 수의학과 선배면서 천기철씨 친구인 양원주동물병원장 등 5명이다. 읍내 동부렌트카에서 스타렉스를 빌려 현산면, 송지면을 거쳐 갈두선착장으로 간 다음 카훼리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
현산 너른 들판을 지나면서 입버릇 넋두리가 나온다.
“내 생각으로 어부사시사는 보길도가 아니라 바로 여기서 지은 것 같아. 지금은 평야가 된 이 구비구비 바다 막기 전을 상상해봐. 동호 (東湖)를 돌아보며 서호로 가자스라는 여기서 할 소리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부용동(芙蓉洞)에서 나올 싯구가 아니라고.”
부용동 높은 터 동천석실(洞天石室) 올라서니 낙서재(樂書齋), 곡수당(曲 水堂), 하한대(夏寒臺), 혁희대(赫羲臺)가 발 아래 벌여있다. 그런데 이 활원한 풍경에서 동천은 어디 있고 석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동천은 돈짝만한 하늘이고 석실은 바위굴인데… 저으기 실망하여 팽팽히 하산하니 상록수 숲길이 대낮에도 깜깜하다.
흠칫 놀라 뒤돌아보는데 동그란 구멍 가운데 방금 본 한칸집이 홀로 소슬하다. 아아, 동천은 이 숲을 나가기 직전 보이는 하늘이고 석실은 여기저기 제멋대로 늘어선 바위들 사이의 사각좌등(四角 座燈) 같은 집이었다!
수리봉, 격자봉(格紫峯), 안산(案山), 북산으로 둘러싸인 부용동 여기 저기를 돌아보느라 시간이 지체, ‘씻은 듯이 깨끗한 집’ 세연정(洗 然亭)에 도착하니 여섯 시가 넘었다. 하지만 우리는 수없이 이곳을 드나든 천기철씨의 비밀통로로 해서 조선의 3대 원림(園林)으로 연기처럼 들어간다.
동남풍을 막으려 담을 쌓듯 쌓아올린 가산(假山)을 돌아드니 졸졸졸 흐르던 계곡물이 그대로 퍼져 연못이 되고 그 안에 바위들이 개구리처럼 몰려있다. 장국영이 나온 〈패왕별희(霸王別姬)〉의 변검(変臉)도 아니고 어떻게 경치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혹약암(或躍岩), 칠암(七岩), 사투암(射投岩) 이름 들으며 비홍교(飛虹橋) 건너 요대(瑤臺)에 이르르자 단칸 정자의 경요굴(瓊瑤窟)이 맞이한다. 사방에 퇴를 달아 동서남북 삼칸이니 전체로는 아홉칸인데 한가운데 방들이고 서른 두 분합문(分閤門) 모두 올려 장식 하나 없어도 경회루의 화려함이다. 동쪽 한 칸 단을 높여 악사들을 모셔두고 계담(溪潭) 건너 옥소대(玉簫臺) 선녀춤을 추게 하여 물에 비치는 풍경 즐겼고 판석보(板石洑) 막은 물을 오입삼출(五入三出) 수구(水口)로 빼 회수담(回水潭)을 만들고는 가운데 방도(方島) 꾸며 소나무를 심어두어 계담 원도(圓島) 배롱나무 동서 짝이 되게 했네~.
가장 인상적인 데는 계담 서쪽의, 백사장처럼 펼쳐져있는 물가 암반이다. 수위가 높았을 때 물이 실어온 흙과 잔자갈이 구르고있는 물 빠진 저수지 같은 풍경… 그 앞 연못 어리연꽃 빈틈의 물 낯바닥에 세연정 지붕이 잠겨있다.
“거그 사람들 얼릉 안 나가고 뭐하요? 여섯시가 넘었는디… 이 시간에 사고라도 나면 우리 책임이란 말이요. 어치께 드르왔소? 싸게싸게 나가쇼 잉.”
어디선가, 돌아가며 맡는 듯한 동네 관리인의 애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할머니와 숨바꼭질 하듯 연못을 돌며 되는 대로 사진을 찍고 서둘러 밖으로 나간다. 낙원은 언제나 짧은 시간만 볼 수 있는 것 같다.
두륜산은 비를 몰고 찾아갔다. 이어 천기철씨 지인 성진스님의 배려로 템플스테이를 했다. 그리고 난생 처음 새벽 예불에 참례했다. 대웅전 앞 침계루(枕溪樓)의 북소리로 시작하는 의식은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삼계도사(三界導師) 사생자부(四生慈父)시아 본사(是我本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삼계의 큰 스승이며 뭇 생명의 어버이이신 우리의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나자 날은 맑게 개어있다. 사무실에 일이 있다며 해남으로 나가는 천기철씨에게 등산코스를 물어본다. 근래 만일암까지 찻길이 났다길래 그걸 피해 가기 위해서다.
“북암으로 해서 가련봉 올랐다가 두륜봉 지나 진불암으로 내려오쇼.”
북미륵암을 줄여 부르는 북암의 미륵불은 근래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보호각인 용화전(龍華殿) 단청을 하느라 어수선한 상황이다. 덕분에 비계(飛階)로 올라가 부처님을 코앞에서 알현하는 영광을 누린다. 석가모니 입적 후 56억7천만 년 뒤에 오신다는 미륵불의 용화세계가 열리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오소재와 노승봉 지나 가련봉(迦蓮峯 700m)을 넘으면서는 “가아련다 떠나련다” 노래하며 흥을 돋운다. 비 온 뒤 파란 하늘과 구름 쓸어 가는 바람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오늘 밤에는 시키지 않아도 노래 한 자리씩은 부를 듯하다. 마지막 답사지 금쇄동(金鎖洞)은 고산의 〈금쇄동기〉를 들고 찾아간다.
“금쇄동은 문소동(聞簫洞) 동쪽 제일봉 위에 있다. 그 높음은 진정 해와 달에 비견되며 비와 바람을 끼고있는, 하늘 밝고 연하 (煙霞) 그윽한 동천(洞天)인바 천석(泉石)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이다. 산 뒤쪽으로 완만하게 올라가니 썩 험하지는 않은데 아득히 멀고 멀어 인적은 드물다.”
하지만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수십 보를 가다 남쪽으로 꺾어 수 십 걸음을 하면 석문(石門)이 나오는바 큰 바위가 공중을 가로질러 세상의 수레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로 말미암으면 동천으로 드는 길이 어긋날 수 없으니 (그런 의미의) 불차(不差)라고 하였다” 했는데 세상에 이렇게 자세한 유산기가 없다. 세번째 지형지물 기구대(棄拘臺)는 또 “층암(層巖)이 평탄한 데다가 벼랑의 바위가 지붕처럼 위를 덮어 여럿이 쉴 수 있다” 했는바 “여기에 이르면 왔던 길도 알 수 없고 돌아갈 길도 모르며 제 몸이 얼마나 높은 데 있는지 깨닫지도 못하니 사방을 둘러보면 풍진(風塵) 세상과 이미 멀리 있다” 하면서 ‘구속을 떨치는 돈대’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또 동쪽으로 두 번, 서쪽으로 두 번, 북쪽으로 한 번, 남쪽으로 한 번 꺾어 오르면 등성이에 작은 대(臺)가 있는데 썩 기이하지는 않으나 가슴을 쓰다듬으며 앉았다 가기에 적당해 상휴(上休)로 명명했고 거기서 북쪽으로 10보쯤 올라가면 3층 석대(石臺)가 있어 앉아 있노라면 마음과 눈이 상쾌해지면서 세상 미련을 풀어버릴 수 있으므로 창고(暢高), ‘높은 경지에 이르는 자리’라 하였다.” 하여 이 대단한 안내문을 들고 호기롭게 산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현실은 글과 영 딴판이었다. 가파른 비럭땅에 수풀이 우거져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으며 직접 보니 한문 설명은 바위 모양과 비슷한 구석조차 없었다. 그렇게 폭포골로 천기철씨가 비정해놓은 지형지물들을 따라 올라갔는데 폭포를 지나 정상부의 현산고성(懸山古城)에 이르렀어도 금쇄동은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다. “낭패네. 겨울에 낙엽이 진 다음에 다시 와봐야겠구만.”
“여기는 양몽와(養蒙窩)고요 여기는 불훤료(不喧寮), 여기는 휘수정(揮手亭), 여기는 교의재(敎義齋)…” 천씨의 설명을 귓등으로 들으며 혼자 서쪽으로 가다보니 뒷사람들 따라오는 기척이 없다. 그래 한참을 기다리다 찾으러 돌아가는데 지형이 점점 이상해진다. 서향 등성이를 타야하나 가도가도 그런 건 보이지 않고 엉뚱한 방향의 사면만 나올 뿐이다. 길을 잃었다. 스맛폰 전지가 30%밖에 안 남아 일단 비행기모드로 바꾼다. 다음 기기에서 나침반을 띄워 방향을 잡는다. 그리고 계속 서쪽 능선을 찾다보니 마침내 고산의 묘와 연결되는 신작로를 만난다.
윤선도묘는 문인석 둘을 앞에 세운 왕무덤이다. 정3품 당상관밖에 안 되는데도 크기가 이순신 장군것 못지않게 크다.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천하명당은 어떻게 장풍(藏風)과 득수(得水)를 했나 싶어 사방을 둘러보지만 키다리 나무들에 가려 산세를 볼 수 없다.
이윽고 크노소스 궁전의 미로 같은 금쇄동을 빠져나간 뒤 문소동에서 일행을 만난다. 다음, 들어올 때 예약해 둔 택시를 불러 읍내 태평양식당으로 하모 샤브샤브를 먹으러 간다. 보길도 민박집의 상다리 부러지는 어촌백반, 강진 반값 여행이라는 좋은 기회에 편승해 가본 다강식당의 수라상 같은 한정식, 대흥사의 정갈한 사찰음식, 건정 홍어와 민어찜… 우리의 이번 여행은 음식기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남도의 제왕으로 살았을 고산의 팔자가 부럽지 않았다.
1989년 창간 2025. 8 월호 지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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