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1/2025
한국 근대 디자인은 서구의 자생적 모더니즘처럼 기계문명과 기술 발전에서 자연히 파생된 흐름이 아닙니다. 식민지 지배, 전쟁, 국가 주도의 개발 정책 속에서 단속적으로 형성되었고, 디자인은 근대화의 수단이자 정체성을 만드는 장치로 기능했죠.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주도한 ‘한국적 정체성’은 국민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승리’ ‘무궁화’ ‘진달래’ 같은 서정적 이름이 ‘재건’ ‘새나라’ ‘충성’ ‘거북선’ 등으로 바뀌면서, 전통의 상징들은 국가 이념을 시각화하는 정치적 도구가 되었습니다. 정부가 독점적으로 전매하던 담배 이름만 봐도 정권의 방향이 여실히 드러나죠. 주택 개량 운동과 미신 타파 운동, 그리고 각종 선전 포스터와 관광 캠페인 속에서 ‘한국다움’은 근대화의 미명 아래 새로 고안된 규범이었죠. 즉 이 시기의 디자인은 산업 발전과 국민 계몽을 위한 시각 전략이자 일상에 스며든 권력의 언어였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 민족주의 담론은 “세계 속의 한국”을 내세운 문화 정책으로 바뀌었습니다. 서울올림픽과 서울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며 정부는 세계 시장에 내놓을 ‘한국적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야 했고, 짧은 기간에 급조된 이 ‘한국성’은 삼태극, 오방색, 십장생, 하회탈, 한글, 단청 등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를 대거 동원해 구성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국가 캠페인에 따라 미신이나 봉건 잔재로 치부됐던 전통 소재들이 다시 관광 상품 이미지로 편집되었고, 이전 정권이 가장 중요시한 역사적 인물 이순신 장군을 대신해 세종대왕이 새로운 민족 상징으로 떠올랐습니다.
『한국 현대 디자인사』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한국적 정체성’이 자생적 문화의 결과가 아니라, 시대마다 달리 작동한 정치적 기획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1970년대 민족주의가 내부 결속을 위한 시각 전략이었다면, 1980년대 한국성은 세계 시장을 향한 시각적 브랜딩이었습니다. 두 시기의 디자인 모두 ‘한국다움’을 말하지만, 그 언어는 철저히 권력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고 재가공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