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2026
제목(부제) : 내가 역사가 됐어
분야 : 국내도서 - 소설
ISBN / 부가기호 : 979-11-88022-67-0 (03810)
출판사 : 문학여행
저자/역자 : 전금자
정가 : 15,000원
페이지수 : 362
발행일 : 2026년 8월 24일
도서규격(판형/사이즈) : 152*224mm
쉼 없이 읽게 되는
정직한 회상의 힘
47년생 소녀 금자
노란 금빛의 시절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다
전금자
나는 대한민국과 거의 같은 나이로 1세기를 살아왔습니다.
여태의 가치와 기준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시대의 초입에 섰습니다.
우주의 입자와 파동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나는 글을 쓰고 있을 겁니다.
1부 - 어떤 아이, 금자
1장_1951년 부산 부평동
2장_동광동 큰불
3장_미싱골목 명애네
4장_도미네 집으로
5장_새 할머니와 고모부
6장_금자가 좋아한 오빠
7장_화경이네
8장_여성국극단과 김길자
9장_구롬보 장씨와 조합장이 된 아버지
10장_꿈
2부 - 새로운 세상 속으로
1장_1학년이 된 금자
2장_2학년, 새로운 동무들
3장_3학년, 엄마의 치맛바람
4장_하늘을 덮을 만큼 큰 검은 보자기가 너울거리며 내려오고
5장_굴러온 개뼈다귀
6장_그래 판을 뒤집자
7장_푸른 잔디 푸르러 봄바람은 살랑
8장_서울 시내 버스 차장이 전부 여자로
9장_엄마의 죽음
10장_‘정말 내 엄마’가 있는 집으로
누구의 삶이든 역사가 된다.
이 책의 화자, 금자의 어조는 시종일관 낡은 앨범을 들여다보듯 담담하고 관조적이다. 등장인물들은 금자를 포함해 시대라는 그물에 함께 엮인 존재들일 뿐, 특별한 애착도 깊은 증오도 부각되지 않는다. 모든 인물들의 행동은 그 모습, 그 시기, 그 위치의 당연한 결과이며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글 속에는 어린 금자가 주인공으로 있지만, 그것을 묘사하는 것은 그 시절에서 멀리 떠나온 나이든 금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금자는 스스로 공감하는 능력 같은 것이 부족하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금자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온 북한 사람들의 아이다. 금자의 부모님은 북한 사투리를 쓰지만, 금자는 부산 사투리를 쓴다. 금자가 초등학생이 되자 '젼금자'는 '전금자'가 된다. 국민 대부분이 가난했던 시절 금자는 맞춤 원피스를 입고 파마를 하며 고급 교복을 입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유복했던 금자 집의 형편은 어려워진다.
금자의 추억은 그 자체로 시대의 기록이자 역사다. 그 시대의 가장들은 당연한 듯 첫 부인 외에도 여러 여인을 두었으며, 어린 금자는 오랫동안 새엄마를 친엄마로 여기며 성장한다. 하지만 새엄마가 병으로 생을 마치는 순간 가짜 모녀 관계의 맨얼굴이 드러난다. 무의식중에 진실을 알고 있던 금자는 죽음을 앞둔 새엄마의 눈이 보내는 차가운 메시지를 부정했다가, 새엄마가 떠난 후엔 잠시 그리워했다가, 곧 이별을 받아들이고 성장한다. 화를 잘 내면서도 너그러우며 고급 옷을 입혀주던 새엄마가 떠나며 금자의 유년기가 끝난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후에야 금자의 아버지는 금자의 '진짜 엄마'에게 가자고 한다. 그 뒤의 일은 금자가 알려주지 않아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득한 어린 시절을 이토록 세밀히 살려낸 것만으로도, 독자는 금자가 자신을 또렷이 들여다보고자 하는 태도를 지키며 살아왔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작가인 전금자는 원래 'AI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부제로 달고 싶어했다. 작가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누구라도 그 거대한 변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그러나 이토록 정직한 회상의 글에, 반세기 전의 시절에서 끝맺는 이야기의 부제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47년생의 소녀가 유년기를 마치고 성장하는 이야기가 반세기 후의 변화를 예민하게 의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AI가 할 수 없는 이야기이므로.
둘러친 포대기 안에서 답답한 아이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안으로 스며든 부드러운 빛으로 포대기 안이 은은한 신비로운 공간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 신비롭던 기억을 아이는 오래도록 기억한다.
- 1부 1장 '1951년 부산 부평동'
엄마는 그렇게 앉아 어떤 상념 속으로 빠져들어 갔는데 그날은 여느 때 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고 가고 있었다. 순간, 엄마는 심하게 몸을 떨더니 시커멓게 변한 얼굴을 떨어뜨리고 알 수 없는 세계 속으로 몰입해 들어갔다. 낯선 얼굴로 변한 엄마의 옆에서 나도 엄마가 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깊고 깊은 끝없는 컴컴한 구멍이었다. 거기는 현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또 다른 세계로 내려다보아도, 보아도 끝이 없는 컴컴한 구멍이었다. 금자는 너무도 무섭고 충격적이어서 그 깊고 끝없는 컴컴함 속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윽고 엄마는 몸서리를 치더니 이내 심하게 도리질했다. 검은 얼굴이 서서히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고 엄마는 두렵고 불안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방바닥을 거듭거듭 짚어 현실을 확인했다. 무얼까? 무엇이 그토록 엄마를 심한 자기 모멸감과 불안감으로 절망의 나락에서 떨게 했을까? 세찬 도리질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까지 갔던 떨쳐버리고 싶고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의 어떤 기억이었다. 금자는 그렇게 이해되었다.
- 1부 9장 '구롬보 장씨와 조합장이 된 아버지'
금자, 혼자 방 안에 있다. 방 중앙에 서서 재빨리 뒤를 돌고, 그런 행동을 반복한다.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되었는데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시선을 거두는 순간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돌아설 때 등 뒤의 모든 사물과 세상이 사라진다. 다시 돌아서면 반대편 세상이 사라진다. 보이지 않는 세상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금자가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본다. 저 사람들은 정말 있는 사람들일까? 보고 있는 순간에만 우리를 위해 있는 가짜사람이야. 금자는 그 사람들을 알 수 없으니까. 그럼, 화경네도 가짤까? 아니야. 그건 아닌 거 같아. 금자는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세상과 사람이 정말 궁금하다. 우리 가족 외의 모든 것은 보고 있는 순간만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그들의 생각도 알 수 없고 느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금자는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사라진 세상이 정말 궁금했다. 그래서 재빨리 돌아보기도 하고 딴 사람들을 유심히 보기도 했다.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양자역학을 알고 있다.
금자, 낮잠을 자고 일어난다. 저녁놀이 흐릿하게 비춰들고 방안에 아무도 없다. 정적 속의 금자, 불안과 공포감에 몸을 떤다. 내 잠재의식 속에는 위험과 사고에 대한 많은 정보가 입력되어 있어 괜스레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그 불안과 공포감은 그즈음 자주 금자를 괴롭혔는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아찔함과 무리의 가장자리에서 무작위로 떼어 내어져 낙오의 대상에 포함되어지는 것 같은 불가항력의 무력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런 공포감에서 헤어나 내가 실제로 앉아있는 방안을 둘러보고 다다미 바닥을 손으로 짚어보고 스스로 안도감을 되찾기도 했다. 내가 왔던 그 깜깜한 곳. 막연한 그곳! 그 깜깜한 곳을 자주 떠올리고 자주 느낀다.
나는 거기서 왔다! 금자는 언젠가 죽을 거라는 것도 안다. 죽음이 가까이 있는 것 같은 생각에 겁에 질린다.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아니었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깜깜함 그 자체에 대한 공포감이었다. 한동안 얼토당토않은 생각들에 빠져있었는데 그것도 성장의 한 단계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 1부 10장 '꿈' 중에서
영숙이가 야릇한 눈으로 금자를 쳐다보며 당돌하게 말한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네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더라. 우리 엄마가 그러더라.”
금자는 반응이 없고 무감각하다. 어쩐지 내가 알고 있는 얘기를 들려주는 기분이다. 자연스럽게 젖어 들어 내 속에 누적돼 알고 있는 부분과 그다지 상충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 2부 9장 '엄마의 죽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