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08/2025
𝐓𝐫𝐚𝐯𝐞𝐥 𝐏𝐚𝐩𝐞𝐫
세계에서 가장 느린 배
일주일간 ‘바다 위 선상 학교, 그린보트’를 탔다. 부산에서 출발해 대만과 일본을 거쳐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핸드폰도 사용할 수 없는 망망대해의 여행. 일주일간 바다는 학교였고 배는 도시였다. 크루즈 위에서 서로 다른 속도의 사람들과 함께 걷고, 듣고, 웃었다. 그리고 멀미라는 이름의 그리움을 안고 배에서 내리기까지의 여정을 여기에 적는다.
세계에서 가장 느린 배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 노란 굴뚝이 인상적인 크루즈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코스타 세레나’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크루즈였다. 지구에 불시착한 거대 생명체처럼 보이는 이 친구가 7박 8일 동안 나의 집이 될 곳이었다. 부산항에서 출국 수속을 마친 후, 배에 올라서자 크루즈 선원들의 환영 인사가 들려왔다. “챠오Ciao!” 멋쩍게 인사말을 따라 발음하자 비로소 여행이 실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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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보트 여행은 크게 선내 생활과 기항지 여행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졌다.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는 동안 여행자들은 크루즈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한 크고 작은 강연장과 공연장, 수백 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식당, 실내외 수영장과 헬스장 등 편의시설,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독서 공간까지, 생활에 불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이번 크루즈에서 눈에 띈 것은 ‘그린 대여소’였다. 다회용기, 수세미, 텀블러는 물론 환경 관련 도서도 대여해 주었는데, 여행이라는 행위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최소화하려는 세심한 노력이 감사했다.
첫 번째 기항지, 타이베이
부산을 떠난 우리는 첫 번째 목적지인 대만 타이베이에 도착했다. 육지의 여행이라면 국경을 넘는 순간, 확연히 달라진 풍경과 입국 절차 속에서 여행을 실감했을 테지만, 바다의 여행은 달랐다. 사방을 둘러싼 바다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고, 변한 것이라곤 1시간의 시차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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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항지 프로그램은 문화, 역사, 환경, 평화 등 다양한 테마에 따라 조별로 나뉘어 진행됐다. 내가 선택한 코스는 국립고궁박물관과 서문정 거리 방문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중국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예술 작품과 유물을 소장한 곳이었다. 도자기, 회화, 서예, 금속 공예품 하나하나가 중국 왕조의 문화적 흐름을 담고 있었다.
세심한 손길이 인상적인, 오키나와
1월의 오키나와는 초가을 날씨처럼 맑고 청명했다. 한적한 유적지를 천천히 걸으며 사색에 잠기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다만,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던 슈리성은 2019년 화재로 전소된 후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온전한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의외의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슈리성의 복원 과정을 공개하고 있던 것이었다. 커다란 벽으로 공사 현장을 가려두는 익숙한 방식 대신 성 전체를 감싸는 가건물을 세워 비와 눈으로부터 현장을 보호하고, 유리창 안에서 인부들이 섬세하게 복원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특히 놀라웠던 건, 아주 낮은 높이에서도 인부들이 일일이 안전띠를 착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연한 안전 수칙이지만, 유적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들의 세심함이 느껴졌다.
완벽한 여행의 마무리, 다케오 올레와 온천
마지막 기항지는 일본 사가 시였다. 나가사키와 가까운 이곳은 올레길과 온천으로 이어지는 고요한 길이었다. 특히 제주 올레길을 기획한 서명숙 이사장이 일본으로 건너가 함께 만든 ‘다케오 올레’가 유명했다. 총 14km에 달하는 올레길 중, 우리는 약 6km를 걸었다.
아침 호수의 고요함, 깔끔하게 정돈된 마을 길, 그리고 이끼 낀 작은 사당까지.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한 줄로 걷는 동안, 누군가는 앞장서 묵묵히 길을 걸었고, 또 누군가는 일행과 나란히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의 끝, 멀미가 시작되는 순간
배에서 내려 단단한 땅을 밟았을 때, 묘하게 물렁한 감각이 발밑에 남았다. 처음엔 단순히 다리가 풀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진처럼 아득하지만 분명한 감각이었다. 일주일 내내 느끼지 못했던 멀미가 그제야 찾아온 것이었다. 문득 그 작은 멀미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멀미가 조금 더 오래 내게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PAPER 2025년 272호
글 김건태
사진 김건태, 그린보트 공식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