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0/2025
통일부 이산가족 행사에서 작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행사에 다녀온 친구가 챙겨온 선물 입니다.
고운 상자 속에 담긴 몇 개의 양갱.
그 단순한 음식이 이토록 마음을 흔들 줄은 몰랐습니다.
손끝으로 그 상자를 열며 문득 떠오른 사람,
평양이 고향이셨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의 삶은 한 인간의 역사이자, 한 민족의 상처였습니다.
6·25 전쟁, 14후퇴, 단신 월남.
그가 걸었던 길 위에는
눈물과 결단, 그리고 잃어버린 고향이 있었습니다.
밤중에 몰래 집을 나서기 전,
할머니 앞에 큰절을 올리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며칠만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은 평생 돌아오지 못한 약속이 되어
이후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로 남았습니다.
아버지는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월남후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셨습니다.
운명의 아이러니였습니다.
고향 친구, 형, 동생들과 총부리를 마주해야 하는 그 현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어린 마음으로 그저 슬프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
그건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견뎌야 했던 고통의 역사였습니다.
아버지가 조국을 지킨 이유는 단 하나,
“자유”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 속에서 자라난 내가 지금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며 글을 씁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서울의 공기 속에서, 서울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지요.
그러나 나의 뿌리는 북쪽입니다.
아버지는 평양, 어머니는 황해도 출신.
이래저래 우리 집은 이산가족입니다.
어릴 적 학교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보며
TV 앞에서 눈물을 훔치던 어른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압니다.
그 눈물은 단지 그리움이 아니라
끊어진 역사를 다시 잇고 싶은 마음의 외침이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함께 월남했던 조카도 KBS 이산가족찾기 행사에서 만났습니다.
나는 젊은 시절 장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신원조회에서 떨어졌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가 북쪽 출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북쪽에 높은 계급의 군인이 친척으로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날, 하늘을 보며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출신이 왜 내 인생을 막는가.”
그날의 서러움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합니다.
그 시절의 대한민국은
너무 많은 상처를 품고 있었던 나라였다는 것을.
나는 분단의 시대를 관통한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 상처를 원망하기보다
기억하며, 치유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행사장에서 받은 양갱을 손에 쥐었습니다.
손끝에 느껴지는 달콤한 묵직함.
그 작은 덩어리 안에는
수많은 사연과 세월이 녹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주름진 손이 떠올랐습니다.
밤마다 고향의 하늘을 그리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북쪽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숨을 쉬던 그분의 모습이 선했습니다.
양갱의 달콤함은 그리움의 쓴맛과 함께였습니다.
달지만, 눈물이 고이는 맛.
그것이 바로 이산의 세월이 남긴 맛이었습니다.
올해 아흔하나, 1934년생이신 어머니는
이제 몸이 불편하십니다.
허리 통증과 기립성 저혈압으로 누워 계신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어머니는 홀로 긴 세월을 견디셨습니다.
전쟁의 상처와 가난, 그리고 이산의 외로움을
신앙으로 이겨내셨던 분입니다.
나는 장남으로서, 이제 남은 생을
어머니의 평안과 안식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어머니의 고단한 인생이 이제는 평안 속에 머물게 하소서.”
우리 가족에게 통일은 단순한 정치적 과제가 아닙니다.
그건 잃어버린 가족의 이름을 되찾는 일입니다.
고향의 산과 강,
그곳에 묻힌 조상들의 숨결을 다시 만나는 일입니다.
나는 북쪽의 내 핏줄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전쟁이 다시 난다면
주저 없이 대한민국의 안녕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란 내 사명입니다.
그러나 싸움이 아니라, 화해로 가는 길을 더 원합니다.
그 길 끝에서 언젠가,
평양의 하늘 아래에서
“아버지, 이제 고향에 왔어요.”
그 말을 건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는 부유 했다고 합니다.
어릴때 대동강에서 그 당시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답니다.
아버지의 누님은 미모가 뛰어 났는데 수풍발전소 소장에게 시집을 가서 잘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누님이 아버님을 많이 사랑해 줬답니다.
양갱을 한입 베어물었습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 어머니의 기도,
그리고 나의 지난 시간이 겹쳐졌습니다.
통일부의 이 작은 선물은
단순한 과자가 아니라
세대를 잇는 위로의 언어였습니다.
그건 “당신의 이야기는 잊히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과도 같았습니다.
나는 오늘 그 양갱을 먹으며 다짐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이야기를 전하겠다고.
아버지의 평양, 어머니의 황해도,
그리고 서울에서 이어진 이 생명의 줄기를
세상에 남기겠다고.
이제는 부모님 세대의 기억을
아들 세대가 이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잊으면, 역사는 또다시 되풀이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면,
고통은 언젠가 치유로 바뀔 것입니다.
통일은 멀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
나는 이 작은 양갱 하나에
평양의 바람, 황해도의 하늘,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을 새기겠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남과 북의 경계가 사라진 날,
우리 모두가 한 상 위에 둘러앉아
이 양갱처럼 달콤한 평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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