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2025
공감하는 비판 있어서 공유.
"그런데 책을 모두 읽은 후의 저는 이 책에 결코 좋은 평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저는 이 책이 '나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못썼다거나 구리다거나 하는게 아니고, 나.쁘.고, 민주주의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의 이유를 몇 가지만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황현필이 쓴 '황현필의 진보를 위한 역사'를 읽었습니다.
틈날 때마다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한국에서 '역사'는 상대를 비판/비난하기 위한 근거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근현대사에 관한 논쟁은 정치에 연루된 진영 간 이념싸움으로까지 번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보니 차분한 토론을 통해 접점을 늘려가...는 건 언감생심이고, 대부분은 터무니없고 극단적인 수준으로 각자의 주장이 자기진화하는 지경까지 되곤 합니다. 특히 극우 유튜브 등을 중심으로 나오는 주장들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렇게까지 저열하게 말할 수 있나' 싶은 것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황현필의 진보를 위한 역사』는 그런 논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듭니다. '진짜 진보의 지침서 & 가짜 극우의 계몽서'라고 쓰인 표지에서부터 '식민지근대화론 거짓말을 그만하라', '식민지 수탈과 학살의 진실을 말하라', '독립운동을 상처 내지 말라'고 (강력하게 명령하는!) 목차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 논쟁에서 제기되는 여러 저열한 주장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반박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니 근현대사에서 제기되는 온갖 저열한 주장들 때문에 체증을 앓고 계셨던 분에게는 이 책이 정말 특효약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근현대사 공부를 직업으로 삼은 저 역시도 그런 체증이 있었기에 이런 책은 저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책을 모두 읽은 후의 저는 이 책에 결코 좋은 평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저는 이 책이 '나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못썼다거나 구리다거나 하는게 아니고, 나.쁘.고, 민주주의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의 이유를 몇 가지만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역사학 연구자의 관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이 책은 놀라울 정도로 역사학계의 연구성과에 무관심합니다. 학계에서는 이미 진작에 극복/폐기된 이야기들이 이 책의 지면을 채우고 있어서,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드는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토지조사사업 부분입니다. 이 책은 초반에 식민지기의 토지 수탈 문제를 다루면서 1910년대에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으로 전 국토의 40~50%(73쪽, 84쪽))가 일본의 손으로 들어갔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이미 수십 년 전에 각하된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도 이런 주장을 하지 않지요. 이러한 주장은 (아마 오래 전 신용하의 주장으로 처음 제기되었을 겁니다) 1974년부터 2003년까지의 국정 역사교과서에 수록되었지만 1990년대 이후 실증적 연구를 통해 반박되어 지금은 한국사 교과서는 물론이고 진지한 연구자라면 누구도 (심지어 조선총독부의 식민지정책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연구자조차도) 이렇게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조선인들의 토지소유권이 드라마틱하게 변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 이송순, 「쌀을 팔아 다른 소비를 늘렸을 것이라고?」,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 '뉴라이트 역사학의 반일종족주의론' 비판』, 푸른역사, 2020, 109~110쪽; 박찬승, 『21세기 한국사학의 진로』, 한양대학교 출판부, 2019, 164~165쪽; 조형근, 『우리 안의 친일』, 역사비평사, 2022, 70~71쪽.
오히려 최근의 연구는 식민지기의 농촌경제 수탈을 비판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비호와 고리대 등을 통한 일본인 농장, 고리대금업자, 상인들의 토지 점유와 헐값 매입, 그리고 쌀의 강제 이출로 초래된 전반적인 생활수준 하락을 지적하는 것에 더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십 년 전에 극복된 낡고 엉성한 주장을 빌어와 대단한 혜안인양 말하는 것은 오히려 식민지미화론자에게 매우 훌륭한 먹잇감이 될 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식민지미화론에 대한 철저한 비판은커녕 오히려 식민지미화론을 위해 가장 풍부한 토양이 되어주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독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가서 이 책을 근거로 하여 일제의 농촌경제 수탈을 지적하다가는 개망신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말하는 부분에서는, 대체 어디서부터 반박을 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 수준입니다. 이 책은 '남침유도설'이 세계 학계의 정설이지만 오로지 남한 학계에만 남침유도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태연히 말하는데요,(302쪽) 정말이지, 이쯤 되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2025년 현재, 남침유도설은 그 어떤 근거를 통해서도 입증되지 않은, 그저 음모론 수준의 주장에 불과합니다. 물론 과거 어느 시절에 남침유도설이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설명하는 학설로 진지하게 검토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련과 미국의 정부문서가 속속 공개되고 관련 연구가 축적된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남침유도설은 잘해봐야 가담항설이나 농담 삼아 해볼만한 이야기일 뿐 학술적으로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는 주장이 아닙니다. 흔히 브루스 커밍스가 남침유도설을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런 주장을 확정적으로 한 적도 없거니와 (『한국전쟁의 기원』은 제목 그대로 한국전쟁의 사회경제적 '기원'을 찾는 것에 주력할 뿐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그 책의 주된 관심이 아닙니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주장을 남침유도설로 규정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브루스 커밍스가 여전히 남침유도설을 주장한다면서 (더 정확히는 "부인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313쪽)) 브루스 커밍스를 남침유도설의 의자에 억지로 끌어다 앉힙니다.
**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을 말하다」, 『중앙일보』 2013년 8월 31일자.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483293)
브루스 커밍스 외에 박태균 선생님도 남침유도설의 의자에 끌어 앉혀진 '피해자'입니다. 이 책은 남침유도설을 정설로 주장하면서 박태균의 글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합니다만 이 부분에서 박태균 선생님은 졸지에 남침유도설 지지자가 되는 것이지요. 글쎄요,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박태균 선생님이 남침유도설을 지지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고, 그의 주장을 남침유도설로 규정해도 괜찮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말씀이 남침유도설의 근거로 활용된다는 데 대해서 박태균 선생님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도 궁금합니다. (그런 와중에 또 하나 의아한 것은, 정착 이 책의 해당 내용 대부분은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이 북한의 남침 움직임을 상당한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남침유도설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이 책이 각 절의 끝에 꼬박꼬박 달아놓은 참고문헌 목록도 의아합니다. 참고문헌이라고 달아놓은 책이나 논문의 내용이 정작 해당 절의 내용과는 상반되는 경우가 꽤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제시한 참고문헌이 워낙 많아서 제가 모든 경우를 다 살펴본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이미 살펴본 문헌으로만 한정해도 이 책이 정말로 이 문헌을 참고한 것인지 의아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컨대 이 책은 1장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은 이론으로서 가치를 찾아볼 수 없"으며 "소수의 거짓말쟁이가 의도를 가지고 자행한 수준 낮은 역사 왜곡에 불과하다"(이상 27~28쪽)라고 말하는데, 1장에서 참고문헌 중 하나로 제시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박섭 외, 백산서당, 2004.)은 이 책의 이러한 주장과 거리가 한참 멉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식민지근대화론'을 허황된 괴설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근대화론이 제기될 수 있었던 1960년대 이후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연구사적 맥락을 설명하는데 집중합니다. 또한 식민지근대화론을 단순한 식민지미화론으로 치부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나 민족주의로 과도하게 경도된 기존의 관점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로 이해하려고 애쓰지요. 따라서 식민지근대화론을 식민지미화론으로 몰아붙이는 근거로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을 제시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대체 어디를 어떻게 참고했다는 걸까요.
의열투쟁을 테러리즘으로 매도할 수 없다고 말하는 24절에서는 손성욱 선생님의 「'암살'에서 '의거'로 - 20세기 전반 중국의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보도를 중심으로」(『동국사학』 78, 2023.)이 참고문헌으로 제시됩니다. 의열투쟁을 지금의 '테러리즘'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이 책의 주장에는 저도 동의합니다만, 그 근거로 손성욱 선생님의 논문이 인용되는 것은 다소 어색합니다. (선생님 아셨습니까...) 손성욱 선생님의 논문은 안중근과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를 다룬 중국의 언론 기사를 통해 이들이 중국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지사의 이미지로 자리잡는 과정을 살펴보고, 이렇게 형성된 이미지와 공감대를 통해 한국과 중국이 자연스럽게 공동의 항일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논문이 의열투쟁과 테러리즘을 등치할 수 있는지를 다루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이 책의 내용 역시 이 논문의 내용과 딱히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하니 이 책이 제시하는 참고문헌 목록에 좀체 신뢰가 가질 않습니다. (이 외에도 통사적 서술에 가까운 『신편 한국사』 같은 전집류가 참고문헌으로 제시되는 것 역시 눈에 거슬립니다.)
역사책에서 참고문헌을 제시하는 것은 '내가 이만큼 많은 책을 봤다'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판단의 근거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투명하게 제시하여 누구나 그 주장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증가능성'이라고 하고, 이 반증가능성은 어떤 주장이 학문적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제시하는 참고문헌 목록은 정말로 책을 서술하면서 '참고한 문헌의 목록'이 아니라 그저 책의 신뢰도를 블러핑하기 위해 제목만 보고 달아놓은 '키워드 검색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이 책에 있는 모든 참고문헌을 다 검증한 것은 아니기에 모든 참고문헌이 다 그렇다고 확답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신뢰도를 부풀리기 위한 눈속임이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 의심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앞에서 이 책이 "나.쁘.고,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라고 강하게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저는 이 책이 자기의 주장을 위해 권위와 정보의 격차를 악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작에 사라지고 없어진 이야기를 억지로 끌어온 이 책이, 지난 수십년간 무명의 연구자들이 착실하게 쌓아둔 이야기들에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한 이 책이, 책으로 출판되어 비교적 높은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한국사 강사와 교사로 오랜 시간 커리어를 쌓아온 저자의 '권위' 때문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독자는 저자의 이러한 '권위'를 믿고 이 책을 샀을 겁니다. 따라서 이런 따위의 이야기들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아도, 역사학의 연구성과를 일일이 업데이트하기 어려운 보통의 비전공 독자로서는 이 책의 내용을 그냥 그런갑다...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가 차고 넘치는 세상이기에 오히려 더 정제되고 검증된 정보가 필요한데, 어떤 글과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빤히 아는 (혹은 아주 약간의 수고만 들여도 그런 글과 이야기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저자가 마치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정보를 통제하면서 자기 주장을 전개하는 겁니다. 글을 쓸 수 있는 지면이 있다고, 책을 낼 수 있는 권위가 있다고, 정보의 격차를 이용해 멀쩡한 정보체계를 왜곡하는 거죠. 배우셨다는 분이, 그 배움으로 유튜브 등을 통해 지적·사회적 영향력까지 누리시는 분께서 이러는건 정말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문헌에 대해서는, 다른 의미로 눈에 거슬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주렁주렁 달린 참고문헌들과 달리 정작 본문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인용이 간혹 보입니다. 예컨대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의 필요성을 주장했"(151쪽)다는 말은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일본군 '위안부'가 생기기 한참 전인 1901년에 사망한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런 말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실상 성노예에 가까웠던) 가라유키상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한 것은 맞습니다. 따라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군사적 목적에 성性을 동원하는 것을 옹호했다는 의미로 이 말을 인용한 것이고, 이를 통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성 동원을 비판하고자 했다면 이 서술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고 선해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저자는 가라유키상과 '위안부'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92쪽))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는 어디까지나 한국인 피해자를 지칭할 뿐이고, 국적/민족과 무관한 성性 동원 비판은 이 책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이 책은 성을 군사적 목적으로 동원하는 것을 지적하며 근대국가가 신체를 동원하는 것이나 이 과정에서 가부장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성찰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의 인간사냥과 성노예 DNA"(90쪽)를 언급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가 마치 일본만의 고유하고 본질적인 문제인 것처럼 서술합니다. 식민지기에 자행된 성 동원에 대해 근본적이고 단호한 방식으로 절연하지 못한 탓에 한국 사회가 195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여성의 신체를 군사적 목적을 위한 동원의 대상으로 간주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한국군 '위안부'나 기지촌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러한 성찰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책은 성 동원 외에도 "수탈"(75쪽)과 "학살"(100쪽)을 말할 때도 "DNA"라는 표현을 갖다붙여서 일본인을 본질화하는 서술을 반복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이 책에서 매우 일관되게 관철되는데, 일본에 대해서만큼은 가능한 모든 언어를 동원하여 비난과 비판을 퍼붓습니다. 박훈 선생님이 지적한대로, 조선을 식민지배했다는 결론을 무한히 소급하여 이런 식으로 일본을 침략자이자 악마로 본질화하는 태도는 맹목적인 적개심만을 자극할 뿐 현명한 대일對日 태도를 방해합니다.***
*** 박훈,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 어크로스, 2025, 179~180, 204쪽.
일본에 대해 거의 무제한으로 뿜어져 나오는 내셔널리즘(민족주의)적 적개심은 해방 이후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급기야 괴상한 주장으로까지 치닫습니다.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이 분단되었어야 했다.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일본을 관서와 관동으로 나눈 다음, 미국이 관서를 점령하고 소련이 관동을 점령했어야 했다."(196쪽)라는 문장에서 저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냉전을 극복하고 동북아시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지만 일본에 대한 저자의 적개심 앞에서 이런 상식은 설자리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책 전반에 짙게 밴 내셔널리즘이 단지 일본에 대한 민족주의적 적개심으로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기실 이 책은 도처에서 국가주의적 지향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책이 남한과 북한이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로 드는 것들은 대체로 영토의 확장과 인구의 증가, 소비시장과 노동력의 확보 등, '강력한 국가'에 대한 열망와 연결됩니다. 이 책은 남북통일이 "우리의 원래 영토를 회복하는 과정"이자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며, 북한의 2,700만 인구는 "내수 시장"이자 "우리 기업에 새로운 경쟁을 불어넣을" 노동력이라고 봅니다. (이상 483~484쪽) (그리고 그 뒤에는 어김없이 "외국인 근로자가 한국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보다 북한의 노동력이 훨씬 긍정적인 해결책이지 않은가"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물론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로 평화를 가장 먼저 제시하기는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언급과 '부강한 국가경제'에 대한 언급을 분량으로만 비교해봐도 이 책의 지향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는 명확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특정한 대상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판을 쏟아낼 때 종종 발견되는 논리적 실수는 '비판할 수만 있다면 손에 잡히는대로 다 집어던지기'입니다. 되는대로 무작정 일본을 비판하는데 주력하다보니 스스로의 논리적 일관성조차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낙후되고 나빴는지를 말하기 위해서 이 책은 비교대상으로 조선을 제시합니다. 이 부분에서 이 책은 조선이 "(일본과 달리) 군주 중에는 성군이 많았고, 무능했다고 하더라도 백성을 건사하려는 (...) 노력은 눈물겨울 지경 (...) 탐관오리는 사실상 버티기 힘들었고, 왕의 애민愛民 의지와 여러 시스템하에서 (...) 백성들의 삶은 철저히 보호되고 있었다"(80쪽)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성리학자 대신 독립운동가의 초상이 지폐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조선의 지배층인 성리학자는) 조선을 긍정적으로 바꾸지 못했다. 백성들의 삶과 행복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도 없"(149쪽)다고 하여 조금 전과는 매우 상반된 설명을 제시합니다. 불과 몇십 쪽을 사이에 두고 이 정도로 평가가 상반되면, 독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이 생각하는 조선은 어떤 나라일까요. '(그 역시도 성리학에 기반하고 있었을) 국왕이 투철한 애민 정신으로 무장하여 불철주야 백성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 요순의 나라'인가요, '백성의 삶과 행복에 아무런 기여도 못한 성리학자들이 지배층으로 군림한 봉건지배체제'일까요. 아니, 아수라 백작도 아니고 이게 뭔가요. (그나저나 100원 동전에 얼굴이 새겨진 이순신(의 가치)이 500원 동전에 새겨진 학(의 가치)의 1/5이라는 말(150쪽)은 또 무슨 말일까요. 어떤 인물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존중이 그가 새겨진 화폐의 가치와 연동된다니, 참신해도 너무 참신한 생각 아닌가요.)
'손에 잡히는대로 다 집어던지는' 바람에 논리적 일관성이 무너지는 부분은 더 있습니다. 이 책은 4.3사건 당시의 민간인 학살을 두고 "해충을 잡기 위해 (...) 농약을 침으로써 (...) 무고한 곤충도 안타깝게 죽었"다는 어느 유튜버(ㅇㅅㅇ이죠, 아마)의 말을 두고 "사람 새끼인가 싶다"(230쪽)라며 격하게 분노를 뿜어냅니다. 이런 분노에는 저 역시도 상당히 공감합니다. 게릴라 활동이 활발했던 당시 제주도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죄 없는 민간인에 대한 폭력은 절대로 합리화될 수 없으며, 혐의가 있는 게릴라와 무고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수십 쪽을 채 지나지 않아 이 책은 또다시 상반된 입장을 취합니다. 이 책은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는 "프랑스는 나치의 통치하에 5년 동안 부역했던 친나치행위자들을 처벌하는데, 그 숫자가 16만 명에 달했다. 그중 1만 명은 재판도 없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276쪽)라고 합니다. 즉, 약 1만 명에게 재판도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을 긍정적인 사례로 인용하는 것이죠.
그러면 독자는 이 책이 4.3사건 당시의 민간인 학살에 분노한 이유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4.3사건을 서술할 때는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에 대해 격노했는데, 프랑스에서 재판도 없이 부역 혐의로 1만 명가량이 사형을 당했다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점도 느끼지 못하는게, 좀체 납득되지 않는 것이 저 뿐인가요. 이 책이 4.3사건 당시의 민간인 학살에 분노하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죄 없는 민간인이 법과 제도에 의해 생명권을 보장받지 못했고 국가가 물리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법과 제도에 의한 절차와 제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여기서 저는 이 책의 밑바탕에 전반적으로 '나는 정의롭다'는 정념이 짙게 깔려 있다고 느꼈습니다. 내가 정의로우니까, 내가 옳으니까, 법적·제도적 절차와 제약이 나를 방해해서는 안 되고, 정의롭지 못한 내 상대방은 그저 단순한 악마일 뿐이라는 정념 말입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나 확신을 넘어, 선과 악의 대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분법적 세계관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결코 민주주의에 걸맞는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오히려 나와 다른 생각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런 생각들에 우리는 마땅히 귀 기울여야 하며, 그런 생각들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나의 생각과 주장을 언제든 기꺼이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태도와 충돌합니다.
세상을 정正과 사邪, 선善과 악惡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세계관은 해방 직후의 탁치 논쟁 부분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납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 책은 "(나는) 역사학도로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찬탁이 옳았다고 말할 것"(207쪽)이며, 신탁통치 거부가 분단과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고까지 말합니다. 실로 '반탁 만악설'이라고 할만한 이 주장 앞에서, 그렇다면 모스크바3상 회의 결과 지지를 주장한 좌파는 왜 그렇게까지 대중적 지탄을 받았는지, 3상회의의 '임시정부 수립' 주장이 즉각적인 주권 회복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러한 대중적 염원에 대한 좌파의 이해와 판단이 너무 안이하고 경솔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성찰은 갈 곳을 잃습니다. 당대의 현실이 이분법적이었다고 해서 그 시대를 역사로서 바라보는 지금 우리의 관점까지 이분법적일 필요는 없는데, 왜 이 책은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성찰과 생각의 기회들을 이런 식으로 폐기해버리는 걸까요. 주어진 몇 개의 선택지에서 단 하나만 골라야 하는 고민은 대통령 선거에서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기실 따지고 보면 이 책이 논박하고자 하는 대상도 불분명합니다. 저자가 글 곳곳에서 '신친일파', '친일매국세력' 등으로 부르며 분노를 표하는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떠받"(124쪽)들고, "김구가 쓰치다를 죽이고 재물을 훔치고 도망갔다"(166쪽)라는 거짓말을 지어내며, "대를 이어 일본에 사대하고 독립운동을 폄훼하며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하도록 방해하"(278쪽)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런 표현에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있기야 있겠습니다만, 글쎄요, 유튜브의 어딘가 어두운 한 구석에 모여 슈퍼챗을 주고받는, 정말 한줌 밖에 안 되는 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덧붙이자면, 저는 이 말들이 이 책과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에 대한 라벨링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지금까지 길게 말씀드린 것처럼) 토지조사사업으로 전 국토의 40%가 수탈된 것은 아니라고 보는 사람이나, 남침유도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나, 식민지기에 공업화와 양적 성장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의 성격을 진중하게 따져보려 노력하는 사람이나,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논하면서도 그들 내부의 균열이나 시간에 따른 변화를 세심하게 들여다 보려려는 사람이나, 민주공화국의 정당성이란 법과 제도와 절차의 제약 위에서야 비로소 세워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나, 역사를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한 소재가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성찰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사람들까지 '신친일파'나 '친일매국세력'으로 매도하고 싶은게 아니라면, 이 책의 내용은 대부분 철회되거나 대대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여기까지 쓰고 책을 덮으니 표지에 쓰인 '가짜 극우의 계몽서'라는 표현이 새삼 눈에 들어옵니다. 어딘지 모르게 친숙하다 싶었더니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나왔던, 계엄령을 '계몽령'이라고 부르고 "저는 계몽되었습니다"라고 했던 기괴한 언동들이 떠오릅니다. 모든 시민들이 주권의 담지자임을 천명하고 또한 이들의 주권이 합당하게 행사될 수 있도록 교양과 교육을 제공할 것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 사회에서 누군가를 '계몽'한다는 생각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치열하게 맞서는 것처럼 보이는 양 쪽에서 공히 '계몽'이라는 표현을 내세운 것도 참 공교롭습니다. (이 책의 「작가의 말」에는 비슷한 뜻으로 "정신개조"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어쩌면 '내가 가진 올바른 생각'으로 '저들의 무지몽매함'을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의 구조만큼은, 이 책이나 내란 세력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물론 이 책의 저자와 이 책을 높이 평가하시는 분들이라면야 이런 제 말에 극대노하시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 책과 내란 세력이 서로를 위해 가장 풍부한 토양이 되어주는 공생관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겠습니다.
정말 슬픈 것은 그냥 보아 넘기기에는 이 책이 너무 잘 팔렸다는 점입니다. 역사(학)의 기본도 지키지 않는 괴이한 내용으로 점철된 이 책이 심지어 잘 팔리기까지 했으니, 그래서 이런게 역사(학)라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까지 했으니,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연구자들이 죽어라고 자료 읽고 논문 써서 묵묵히 연구성과 쌓아 놓고 성찰의 지점을 부지런히 개발한 것이 다 무효가 된 것 같아 너무 슬픕니다. 수십 년간 공들여 쌓은 연구의 탑이 잘 팔린 괴서 하나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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