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영음사

도서출판 영음사 영음사는 신앙과 학문 그리고 경건을 겸비한 주경신학자, 정암 박윤선 목사 1954년 부산에서 ‘성문사’로 창립
1961년 상호를 ‘영음사’로 변경 서울로 이전
1979년 박윤선 성경주석 20권 완간

9월 08일: 기도하는 태도와 방식    대문답 185문185.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답: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1)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2) 필요와3) 죄를 깊이 의식하면서 기도...
08/09/2025

9월 08일: 기도하는 태도와 방식

대문답 185
문185.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답: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1)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2) 필요와3) 죄를 깊이 의식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4) 통회하고5) 감사하며6) 넓혀진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7) 또한 이해와8) 믿음과9) 참됨과10) 열정과11) 사랑과12) 인내로13) 하나님을 바라며,14) 그분의 뜻에 겸손히 복종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15)
1) 전 5:1.
2) 창 18:27; 32:10.
3) 눅 15:17~19.
4) 눅 18:13~14.
5) 시 51:17.
6) 빌 4:6.
7) 삼상 1:15; 2:1.
8) 고전 14:15.
9) 막 11:24; 약 1:6.
10) 시 145:18; 17:1.
11) 약 5:16.
12) 딤전 2:8.
13) 엡 6:18.
14) 미 7:7.
15) 마 26:39.

말씀 요절
전 5: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눅 15:17-19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8:13-14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삼상 2: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교리 해설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만 드리는 기도는 어떻게 드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오늘 살펴보는 대요리문답 제185문은 이에 대해 크게 다섯 가지 측면에서 가르쳐 줍니다. (1)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자는 자신이 기도를 드리는 대상이 얼마나 존엄하고 위엄이 있으신 하나님이신지를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시작되어야 하며,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마땅한 태도를 갖추고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 두려움에 떠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소요리문답 제98문과 대요리문답 제178문에서 살핀 바와 같이,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막연한 공포 속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존엄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신뢰 가운데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볍게 여기며, 경외함 없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2)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필요와 죄를 깊이 의식하면서”: 기도자는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곧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격 없는 자이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기도할 수 있는 자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는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더불어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 없이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3) “통회하고 감사하며 넓혀진 마음을 가지고”: 기도자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의의 전가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립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성과 연약함, 그리고 범죄한 행위들을 진심으로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며, 이는 기도의 중요한 태도입니다. 또한 “넓은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표현은 시편 119편 32절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우리 마음을 확장시켜 자유롭고 생기 있게 하며, 기쁨과 담력을 더하는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넓어진 자는 자신의 문제 해결에만 몰두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간구로 기도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4) “또한 이해와 믿음과 참됨과 열정과 사랑과 인내로”: 대요리문답은 기도를 드리는 자가 가져야 할 내면의 영적 특성들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이해”란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가장 선한 방식으로 응답하신다는 신뢰를 가지는 것입니다. “참됨”은 외식 없이 진실하고 성실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겉으로만 경건한 모습을 취하고 기도하여서는 안 되며,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며 진실함으로 기도할 것을 말합니다. “열정”은 형식적인 기도에서 벗어나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사랑”은 기도 속에서 자기중심적 욕망을 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기를 구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끝으로 “인내”는 끈기 있게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두 번 요청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을 아직 받지 못하였더라도 계속해서 구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막무가내로 자신의 필요와 요구를 얻어내기 위하여 하나님께 졸라대라는 것도 아니며, 중언부언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욕망을 이루겠다는 것이며,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내 실망하고 낙담하거나 아니면 분노하고 불만을 표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내”로 기도하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기는커녕,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겸손히 신뢰하면서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지혜로움을 굳게 믿는 가운데, 겸손하고 진실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를 기다리며, 응답하시는 방식에 순종하며 간절히 끊임없이 끈기 있게 올리라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을 바라며, 그분의 뜻에 겸손히 복종함으로”: 앞서 “인내”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의 때를 기다림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 사실이 “하나님을 바라며”에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을 무료하게 기다리거나 시간을 끌고 있는 상황을 참아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믿으며 하나님께서 행하실 때를 신뢰하며 묵묵히 기다리는 것을 뜻합니다. 기다림은 절박하고 간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혜를 따라 행하실 때를 기다립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바로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바라며”라고 할 때, “바라며”(waiting upon)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단지 기다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소망과 인내의 태도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내면의 자세를 뜻합니다. 아직은 어둠 속에 있고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희망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믿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이러한 기다림의 성경적 근거를 대요리문답은 미가서의 말씀에 둡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여기서 “하나님을 바라보나니”가 오늘 대요리문답이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을 바라며”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태도를 보인 인물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욥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욥은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욥 14:14)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욥이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겠다고 할 때, 그 기다림은 바로 미가서에서 말하는 “바라보나니”와 같은 의미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응답이 침묵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립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예배자의 태도로 신뢰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1. 대요리문답 185항에서 학습한 바에 따를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대요
리문답이 강조하고 있는 다섯 가지 측면을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넓은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기도를 “넓은 마음”으로 행하십니까?

3. “인내로 기도한다”는 것은 막무가내로 조르거나 중언부언하는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여러분의 기도는 참된 인내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한 이러한 인내의 기도가 “하나님을 바라며” 드리는 기도와는 어떤 의미에서 연결될 수 있습니까?

4. 여러분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위엄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십니까?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며 무가치한 존재임을 진실하게 고백하십니까? 그 고백이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 사역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9월 07일: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는 기도    대문답 179문179.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합니까?답: 오직 하나님만이 마음을 감찰하시고,1) 요청을 들으시며,2) 죄를 용서하시고,3) 모든 사람의 소원...
07/09/2025

9월 07일: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는 기도
대문답 179
문179.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합니까?
답: 오직 하나님만이 마음을 감찰하시고,1) 요청을 들으시며,2) 죄를 용서하시고,3) 모든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수 있으며,4) 오직 그분만이 신앙과5) 경건한 예배의 대상이 되실 수 있으므로6) 예배의 특별한 한 부분인 기도는7) 오직 그분께만 드려야 하고,8) 그분 외에는 누구에게도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9)
1) 왕상 8:39; 행 1:24; 롬 8:27.
2) 시 65:2.
3) 미 7:18.
4) 시 145:18~19.
5) 롬 10:14.
6) 마 4:10.
7) 고전 1:2.
8) 시 50:15.
9) 롬 10:14.

말씀 요절
왕상 8: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시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미 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시 145:18-19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롬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교리 해설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9월 5일에 신앙고백서 21장 2절을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오늘은 대요리문답 제179항을 통해, 왜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는지를 두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오직 하나님만이 마음을 감찰하시고, 요청을 들으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 응답하실 수 있는 신적 속성들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는 자의 마음 깊은 곳의 생각과 바람, 필요를 모두 아시는 전지하심은 하나님만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또한, 기도자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하실 수 있는 편재하심도 하나님만이 가지신 속성입니다. 더욱이 어제 살핀 대요리문답 178항에서 보았듯이, 죄의 자백은 기도의 핵심 요소입니다. 그런데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실 권세는 하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또한 기도자가 놓인 삶의 모든 상황과 정황은 하나님의 작정 아래 섭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선하게 이끄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은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전능하신 하나님뿐이십니다. 이러한 신적 속성들은 왜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드려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2) “오직 그분만이 신앙과 경건한 예배의 대상이 되시므로, 예배의 특별한 한 부분인 기도는 오직 그분께만 드려져야 하며, 그분 외에는 누구에게도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위한 도구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는 본질상 경건한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예배가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하는 것처럼, 예배의 특별한 요소인 기도 또한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피조물인 인간이 겸비함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과 왕 되심을 고백하는 예배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의 어떤 존재에게 기도를 드리는 행위는 제1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죄가 됩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심각한 우상숭배입니다. 앞서 살핀 대요리문답 178항에서도 기도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감사히 인정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과 인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예배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외의 어떤 대상에게 기도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참람하고 혐오스러운 신성모독의 죄악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적용 질문

1.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 이외의 신비로운 자연 현상이나 조상, 알 수 없는 어떤 힘이나 운명에게 자신의 어려운 문제를 호소하거나 도움을 청한 적이 있으십니까? 이러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죄악임을 인정하십니까? 왜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합니까?

2. 제1계명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사실은, 기도가 예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3.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기도하는 자의 마음의 생각을 아시고, 기도의 요청을 들으시며, 죄의 자백을 받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기도할 때 정말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분이심을 믿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4. 여러분은 예배하는 마음과 태도로 기도하고 계십니까?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여러분의 기도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께 단지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한 소원만을 아뢰는 데에 기도가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9월 06일: 기도의 의미    소문답 98; 대문답 178소문답 98문98. 기도란 무엇입니까?답: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에 한하여,1) 그리스도의 이름으로,2) 우...
05/09/2025

9월 06일: 기도의 의미
소문답 98; 대문답 178

소문답 98
문98. 기도란 무엇입니까?
답: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에 한하여,1) 그리스도의 이름으로,2)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서,3) 그분의 긍휼을 감사함으로 인정함과4) 함께 올려드리는5) 것입니다.
1) 시 62:8.
2) 요일 5:14.
3) 요 16:23.
4) 시 32:5~6; 단 9:4.
5) 빌 4:6.

대문답 178
문178. 기도란 무엇입니까?
답: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해2)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인데,3) 우리 죄를 자백하며4) 그분의 긍휼하심을 감사히 인정하면서 드리는 것입니다.5)
1) 요 16:23.
2) 롬 8:26.
3) 시 62:8.
4) 시 32:5~6; 단 9:4.
5) 빌 4:6.

말씀 요절
시 62: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시 32:5-6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단 9:4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교리 해설
오늘 읽는 소요리문답 98항과 대요리문답 178항은 짧은 문장으로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핵심적인 7가지 요소를 제시하며 설명합니다. (1) 기도의 본질은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기도란 단지 의식 없이 빈말을 하거나 자기 표현을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아뢰는 간구입니다.
(2)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기에, 기도의 유일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닌 성인들이나 천사들, 또는 죽은 자들을 향해 무엇인가를 간구하는 모든 행위는 올바른 기도가 아니며, 참된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3) 죄인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그분과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죄인이 기도를 드릴 수 있으려면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야 합니다.
(4) 신자는 중생한 이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때라도 여전히 연약합니다. 그러한 신자가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함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신자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그 기도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되도록 이끄십니다.
(5)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그 어떤 것이든지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의 교훈에 맞아야 합니다. 신자는 스스로 기도의 내용을 규제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는 예수님의 말씀은 죄악된 것이나 이기적인 목적을 구해도 행하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또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말씀하신 것을 연결하여야 합니다. 기도로 구할 것은 하나님의 교훈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6)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내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의 자백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회개할 특정한 죄를 두고 기도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죄를 자백하며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기도가 결코 자격이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고백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신자가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만을 의지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기도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처럼 경건한 태도가 바로 설 때, 기도 속에 담는 간구 역시 바르고 합당하게 될 수 있습니다.
(7) 기도의 내면적 자세와 관련한 두 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감사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아뢰는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앙과 신뢰를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신앙과 신뢰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적인 마음과 태도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표현은 두 손을 모으거나, 눈을 감거나,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거나, 무릎을 꿇거나, 손을 들거나, 얼굴을 땅에 대는 등 외적 태도로 나타납니다. 오늘 학습하는 기도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간단한 진술이지만, 기도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성과 사역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밝히 가르칩니다.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아뢰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 기도를 받으시는 대표 위격으로 성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아룁니다. 또한 기도는 성자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약한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과 간구에 힘입어 기도합니다. 이처럼 기도가 삼위일체적이라는 진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20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명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명령과 중보를 통한 은혜임을 가르치며, 신자들이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이에 관련된 제116문에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참된 기도를 일으키신다고 명시함으로써, 기도가 삼위일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뒷받침합니다. (참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6항 질문: 그리스도인들은 왜 기도를 해야 합니까? 답: 그 까닭은 기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마음으로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간구하고, 이를 주심에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그의 은혜와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120항 질문: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도록 명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기도를 시작하는 첫머리에서 즉각적으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어린아이와 같은 경외심과 신뢰를 불러일으키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기도의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으며, 육신의 부모가 우리에게 땅의 것들을 거절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께서는 참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주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각성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적용 질문
1. 기도를 구성하는 일곱 가지 요소들은 어떠한 것들입니까? 이러한 각 요소들에 비추어 볼 때, 여러분의 기도는 어떠하십니까?

2. 기도할 때 회개할 특정한 죄가 없어도 죄를 자백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이미 죄의 용서를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신자의 기도에도 이러한 죄의 자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기도할 때 죄의 자백을 하십니까?

3. 기도가 삼위일체적이라는 말을 설명하시기 바랍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의식하면서 기도하십니까?

4. 여러분은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감사하십니까? 그 감사에 대한 표현을 내면적으로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나타냅니까? 여러분은 외적으로 표현하는 감사를 어떤 모양과 태도로 하십니까?

오늘은 책이 나와야 하는데요아무래도 다음주 화요일 정도부터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을 듯 합니다사실  지지난 주 폭우때일산 장항동 일대가 침수되면서저희랑 거래하는 인쇄소 제본소 들도침수 피해를 입었습니다이번 주...
05/09/2025

오늘은 책이 나와야 하는데요
아무래도 다음주 화요일 정도부터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사실 지지난 주 폭우때
일산 장항동 일대가 침수되면서
저희랑 거래하는 인쇄소 제본소 들도
침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번 주 월요일부터 복구가 되었는데요
밀린 작업들 소화하느라고 난리도 아니었네요

보통 5일이면 인쇄 제본 마무리 되는데
이번에는 많이 길어집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책 나올 때까지는
계속 본문 올려드릴께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9월 05일: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    고백서 21.2경건한 예배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1) 천사나 성인(聖人)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에게 드려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
04/09/2025

9월 05일: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

고백서 21.2
경건한 예배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1) 천사나 성인(聖人)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에게 드려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2) 타락한 이후에는 중보자 없이 드려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 한 분 이외에 다른 중보자를 통해 드려서도 안 된다.3)
1) 마 4:10; 요 5:23; 고후 13:13.
2) 골 2:18; 계 19:10; 롬 1:25.
3) 요 14:6; 딤전 2:5; 엡 2:18; 골 3:17.

말씀 요절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골 2: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계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교리 해설
오늘 읽는 신앙고백서 제21장 2절은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를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이 내용을 세 가지 주제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며, 천사나 성인 등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드려서는 안 됩니다. 셋째, 예배는 오직 참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드려야 합니다.
(1) 경건하고 참된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때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삼위 하나님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한 분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서로 구별되는 위격의 특성을 가지십니다. 삼위는 구별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히 하나이며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언제나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 모두께 드리는 것이며,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은 성자와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예배를 사실상 성부 하나님께만 드리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배제하고 성부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예배는 완전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참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둘째, 참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곧 삼위로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진리에 기초하여 우리는 예배가 항상 삼위 하나님께 함께 드려지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물론 기도하거나 찬양할 때, 삼위 중 한 위격을 직접 언급하며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예컨대,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며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라고 성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성자 하나님을 직접 부르며 기도할 수도 있으며, 또한 “성령 하나님이여 도우소서”(롬 8:26–27 참조)라고 기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는 각 위격에게 대표적으로 맡겨진 사역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기도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배가 특정 위격에게만 배타적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삼위일체의 진리를 오해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부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다”라고 주장하거나 “기도는 오직 성부께만 드려야 하므로 예수님께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로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중보하십니다.
(2) 예배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며, 하나님이 아닌 어떤 존재에게도 드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존재는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천사이든 성인이든 아무리 탁월하고 훌륭한 존재일지라도 본질상 피조물일 뿐입니다. 이러한 존재들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제1계명을 어기는 심각한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마리아나 성인들의 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거나 예배 행위를 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성인에게 드리는 행위를 언어적으로 구별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는 “경배 또는 흠숭(latria)”이라 하고, 성인들에게 드리는 것은 “공경 또는 존경(dulia)”이라 하며, 마리아에게는 “특별 공경 또는 지극한 공경(hyperdulia)”이라고 구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단어상의 구분일 뿐 실제 신앙 행위에서는 경배와 공경 사이의 실질적 경계가 흐려지며 종교적 감정 속에서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성인 공경이나 성모 마리아에 대한 특별 공경은 피조물에게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거부되어야 합니다.
(3) 인간은 타락한 이후로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없습니다. 죄는 사람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켰으며, 죄인 된 인간은 그 자체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패한 인간은 반드시 중보자를 통하여서만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로마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차적 중보(secondary mediation)”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마리아와 성인들도 중보자의 역할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를테면 가톨릭은 성모 마리아를 “모든 은총의 중재자(Mediatrix of all graces)”로 높이며, 신자들이 “마리아의 전구(intercession)”를 통해 은혜를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성인들에게도 전구를 요청하는 기도가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그리스도 한 분만이 참된 중보자이심을 훼손하는 심각한 오류입니다. 겉으로는 “이차적”이라고 표현하더라도 실제 신자들의 신앙 정서 안에서는 마리아의 전구가 그리스도의 중보보다 더욱 친밀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나타나기 쉽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충족한 중보 사역을 침해하는 것이며, 그 어떤 형태로든 철저히 배격되어야 할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적용 질문
1.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누구를 의미합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혹시 성부 하나님께만 예배드려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생각은 삼위일체 교리에 비추어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2. 여러분은 예배할 때 삼위 하나님 모두를 인식하고 예배하고 있습니까? 혹시 성부, 성자, 성령 가운데 특정 위격만을 대상으로 예배하거나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나 찬양 속에서 특정 위격을 언급하는 것은 왜 가능한 것이며, 그 경우 어떤 신학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할까요?

3.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latria)와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dulia), 마리아에게 드리는 ‘지극한 공경’(hyperdulia)을 구별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구별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용어의 구별이 실제 예배 행위에서 어떤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4. 타락한 인간은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없다는 교리를 여러분은 받아들이십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가능하게 된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진리에 비추어 볼 때, 마리아나 성인들의 전구를 의지하는 로마 가톨릭의 관행은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합니까?

9월 04일: 예배의 의무와 합당한 방식    고백서 21.1본성의 빛은 만물에 대한 지배권과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만물에게 선을 행하신다. 사람은 온 마음과 ...
03/09/2025

9월 04일: 예배의 의무와 합당한 방식

고백서 21.1
본성의 빛은 만물에 대한 지배권과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만물에게 선을 행하신다. 사람은 온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찬송하고, 이름을 부르고, 의지하며, 섬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1) 하지만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합당한 방식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셨으며 자신의 계시된 뜻으로 제한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이나 사탄의 제안에 따라, 눈에 보이는 표상이나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어떤 방식으로도 하나님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2)
1) 롬 1:20; 행 17:24; 시 119:68; 렘 10:7; 시 31:23; 18:3; 롬 10:12; 시 62:8; 수 24:14; 막 12:33.
2) 신 12:32; 마 15:9; 행 17:25; 마 4:9~10; 신 4:15~19; 출 20:4~6; 골 2:23.

말씀 요절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시 31: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수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신 12:3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마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신 4:15-19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교리 해설
오늘 우리가 읽는 신앙고백서 21장 1절은 하나, 하나님에 대한 본성적 지식, 둘, 그에 따르는 경건의 의무, 셋,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 규범, 넷, 거짓된 예배에 대한 금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1) 본성의 빛에 의하여, 만물의 주재권과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만물에게 선을 베푸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음을 말합니다. 본성의 빛은 곧 일반계시입니다. 보통 일반계시라고 할 때, 그것은 외적인 피조 세계(롬 1:20)와 내적인 도덕적 이성과 양심(롬 2:14-15)을 모두 아울러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본성의 빛은 앞서 1월 2일에 읽은 신앙고백서 1장 1절과 대요리문답 2항, 또 1월 10일에 읽은 신앙고백서 1장 6절에서 살핀 바와 같이, 사람의 내적인 이성적 능력과 마음에 새겨진 도덕법 곧 양심이며, 이성에 의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라고 하여, 피조계를 통한 일반계시를 증거합니다. 그러나 본성의 빛은 이 가운데서 주관적 측면을 가리킵니다. 요컨대, 신앙고백서 21장 1절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역사를 다스리며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 곧 하나님의 주재권과 주권을 아는 것은 성경의 말씀이 없어도 양심과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진술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도덕적 이성과 양심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임을 말하는 증거입니다. 성경도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9),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만물에 선을 베푸심을 밝힙니다.
(2)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본성적 지식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행한 바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경외하고, 사랑하며,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의지하고, 섬겨야 할 의무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을 따라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께 종교적 행위를 실천할 수는 있지만, 이는 자연계시에 근거한 것으로 자연종교라는 한계를 지닙니다. 자연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고 자기 백성을 구속하여 이루시는 참된 언약 종교가 아니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은 일종의 자연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스토아주의는 우주의 질서를 신적 이성(로고스)으로 이해하였고, 이 로고스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것을 덕으로 보았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도 이성과 도덕만으로 충분하다는 소위 “이성의 종교” 사상이 등장했는데, 이것 또한 자연종교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종교는 아담 이후 인간의 죄로 인해 왜곡된 형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가 인간의 인지 능력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본성적 하나님 인식조차도 타락으로 인해 불완전하고 비뚤어진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3) 자연종교의 형태는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은 사람이 스스로 고안하거나, 문화적 행위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성적 지식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는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예배 방식을 친히 제정하시고, 오직 그 계시하신 뜻으로만 제한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담긴 예배의 참되고 합당한 방식을 가리켜 “예배의 규정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라고 부릅니다.
(4) 하나님께서는 특별계시를 통해 예배의 방식을 분명히 밝히셨기 때문에, 그에 어긋나는 모든 방식은 거짓된 예배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이를 피하기 위해 반드시 금해야 할 요소들을 진술합니다. 우선,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에 따라 예배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그것이 이성의 판단에 비추어 더 옳거나 진실되어 보이고, 감정의 고양이나 신비한 체험을 통해 더욱 감동적이고 호소력 있는 것으로 여겨질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이 아니라면 이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예배입니다. 이어서 신앙고백서는 오직 성경에 따라 예배해야 한다는 원리에 위배되는 세 가지 항목을 제시합니다.
첫째, “사탄의 제안”(suggestions of Satan)“입니다. 이는 예배를 타락시키기 위한 사탄의 유혹과 속임수를 의미합니다. 겉보기에는 종교적 경건의 형태를 갖춘 듯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에서 벗어나거나 그것과 충돌하는 방식들입니다. 예를 들어, 극단적인 체험 중심의 예배를 통해 신비주의적 황홀경으로 이끄는 것, 영적 효력이 있다고 주장되는 물건을 예배에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주장으로 성경에 벗어난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 또는 이방 종교의 명상이나 무속 행위를 차용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사탄의 제안에 미혹된 거짓 예배의 사례들입니다. 둘째, ”가시적 표상(visible representation)“을 통한 예배를 금지합니다. 이러한 표상은 사탄의 제안과 마찬가지로 거짓 예배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을 어떠한 형상으로든 표현하려는 모든 시도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며, 이는 출애굽기 20장의 제2계명에 위배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가르치려는 교육적 목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제작하거나 사용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 하나님과 이방신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적 예배(왕하 17:33),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나 성인 성상을 통한 종교 행위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셋째,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예배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합니다. 앞서 언급한 사탄의 제안이나 가시적 형상을 통한 예배는 모두 성경에 의해 명령된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이 범주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고백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두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 모든 형태의 비성경적 예배까지도 철저히 배제해야 함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혹시라도 “사탄의 제안도 아니고, 형상을 통한 것도 아니니 괜찮다”는 식의 회피성 논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곧, 사람의 감정에 부합하거나, 은혜롭게 느껴진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으신 방식이라면 결코 예배에 포함될 수 없다는 원칙을 확증하는 선언입니다.

적용 질문
1. ‘본성의 빛’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성의 빛에 따른 자연종교는 예배와 관련하여 어떤 종교적 의무를 인간에게 알려 줍니까? 그러나 예배와 관련하여 자연종교로는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신앙고백서 21장 1절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바른 예배의 방식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에 반해 금지하고 있는 잘못된 예배 방식들은 무엇입니까?

3.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감정적인 만족이나 신비로운 체험, 혹은 문화적인 익숙함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그 말씀에 따라 예배드리는 방식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4. 여러분이 지금까지 경험한 예배 가운데,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이 섞여 있다고 느껴진 경우는 없었습니까? 그러한 예배에 대해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태도로 반응해 오셨습니까? 만일 그것이 개혁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바르게 고쳐나가야 하겠습니까?

9월 03일: 하나님께서 세우신 합법적 권세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    고백서 20.4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자유가 서로를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도리어 상호 간에 ...
02/09/2025

9월 03일: 하나님께서 세우신 합법적 권세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

고백서 20.4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자유가 서로를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도리어 상호 간에 서로를 지지하고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이렇기 때문에 시민정부의 권세이든 교회의 권세이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실로 합법적인 권세나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를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규례에 저항하는 것이다.1) 이들은 믿음이나 예배나 삶의 태도에 관해 본성의 빛이나 알려진 기독교 원리에 어긋나거나 경건의 능력에 어긋나는 견해를 공표하는 일로 인하여, 또는 이러한 행위를 옹호하는 일로 인하여, 또는 자체의 성질로 보든지 이것들을 공표하거나 옹호하는 방식으로 보든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세우신 외적인 평화와 질서를 파괴하는 이런 잘못된 견해와 행위로 인하여, 교회의 징계에 의해2) 그리고 국가 통치자의 권세에 의해3) 소명하도록 합법적으로 소환되고 소송당할 수 있다.
1) 마 12:25; 벧전 2:13~14, 16; 롬 13:1~7; 히 13:17.
2) 롬 1:32; 고전 5:1, 5, 11, 13; 요이 1:10~11; 살후 3:14; 딤전 6:3~5; 딛 1:10~11, 13; 3:10; 마 18:15~17; 딤전 1:19~20; 계 2:2, 14~15, 20; 3:9.
3) 신 13:6~11; 롬 13:3~4; 요이 1:10~11; 스 7:23, 25~28; 계 17:12, 16~17; 느 13:15, 17, 21~22, 25, 30; 왕하 23:5~6, 9, 20~21; 대하 34:33; 15:12~13, 16; 단 3:29; 딤전 2:2; 사 49:23; 슥 13:2~3.

말씀 요절
벧전 2:13-14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롬 13:1-2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 1: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요이 1:9-11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마 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롬 13:3-4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교리 해설
우리는 신앙고백서 제20장 3절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결코 죄의 습관이나 욕정을 방치하거나 그것을 따를 자유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자유의 오용은 참된 자유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 앞에서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목적이 있으며, 특히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자유에 부여된 영광스러운 특권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관련한 영적 측면에서의 오용을 금하고 바른 목적으로 이끄는 교훈입니다.
오늘 살피는 신앙고백서 20장 4절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합법적인 권세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은 어떠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교훈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두 가지 권세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는 시민 권세입니다. 성경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고 말씀하신 권세는 시민 권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자유를 누립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종종 권세는 자유를 억압하며, 자유는 권세에 대하여 저항합니다. 그러나 시민 권세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서로 갈등하거나 대립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시민 권세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서로를 지지하고 보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빌미로 시민 정부의 합법적 다스림을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은 시민 정부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교훈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밷전 2:13-17) 이 말씀은 복음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시민 권세를 통해 시행하는 질서를 무너뜨리거나 시민 권세에 대한 반역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시민 권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줄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시민 권세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권세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13:1) 특별히 시민 권세는 악을 징벌하고 선을 포상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므로, 이에 저항하거나 반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혼란을 초래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시민 권세에 대하여 반항하기보다 순종함으로써 선한 행실을 도모하고, 복음을 비방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말을 잠잠케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이렇게 행사될 때 그것은 시민 권세를 지지하고 보존합니다. 시민 권세 또한 그리스도인이 양심에 따라 믿음을 실천하고 평화롭게 예배할 수 있도록 사회의 질서와 공의를 유지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지지하고 보존합니다.
(2) 만일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실로 그리스도의 교훈에 어긋나는 죄악을 행하고도 이를 정당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 또는 오용하는 것입니다. 시민 권세이든 교회의 권세이든, 그것이 합법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실로 이에 저항하거나 그 권세의 정당한 집행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규례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양심에 따라 행동할 자유가 있습니다. 양심의 자유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인간의 교훈이나 계명을 따르지 않을 자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에 순종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유를 바로 세우고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분명한 범위의 제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믿음이나 예배, 그리고 삶의 태도와 같은 교리적·도덕적 사안에 있어서, 본성의 빛 곧 도덕적 양심이나 성경에 계시된 예배의 원리에 어긋나는 견해를, 또한 경건의 능력에 반대되는 견해를 옳다고 공표하는 일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 합니다(갈 5:13). 예배의 질서를 자의적으로 정하거나, 이단적 교설을 용인하며, 부도덕한 행위를 정당한 것처럼 공표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4) 나아가, 이러한 잘못된 견해나 행위가 그 자체의 성격으로 인해, 혹은 그것을 유포하거나 옹호하는 방식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외적인 평화와 질서를 해치는 경우, 이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견해나 행위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던지간에 그것 자체로 이미 거짓되고 이단적이며 반도덕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지속적으로 교회 안에 퍼뜨려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균열을 일으키고, 다른 교인들로 하여금 이를 옳은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도록 옹호하는 행위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자유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5) 교회의 외적인 평화와 질서를 파괴하는 잘못된 견해와 행위를 하는 자는 교회의 권세에 따른 권징을 통해서, 또한 시민 정부의 권세를 통해서 그 책임을 묻고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행하는 권징의 수단은 권면, 정직, 수찬정지, 출교 등과 같은 영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반면에 국가 통치자의 권세는 이러한 자들로 인하여 사회에 공적으로 해가 일어나 질서를 어그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도리어 평화의 질서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이들의 잘못된 견해를 유포하지 못하도록 이들의 행위를 억제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고백서는 공공의 질서를 해치는 이단 사상이나 부도덕한 행위를 억제하기 위한 국가 권세의 개입이 정당함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정은 양심의 문제나 진실한 신앙적 확신에 대해 국가 권력이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을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용 질문
1. 시민 권세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충돌하겠습니까? 충돌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
까? 시민 권세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라면, 이 둘과 관련한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2. 신앙고백서가 그리스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활동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믿음이나 예배나 삶의 태도에 있어서 잘못된 견해나 행위들에 대해 교회는 권징할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민 정부가 이러한 잘못된 견해나 행위들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정부가 자신의 권세로 무엇인가를 할 때, 이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4. 여러분의 견해나 행위는 교회의 평화나 질서를 세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불안하게 하거나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말이나 태도가 다른 교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9월 02일: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목적과 왜곡    고백서 20.3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실로 죄의 습관에 빠지거나 욕정에 탐닉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목적을 파괴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목적은 우리가 원수의...
01/09/2025

9월 02일: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목적과 왜곡
고백서 20.3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실로 죄의 습관에 빠지거나 욕정에 탐닉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목적을 파괴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목적은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1)
1) 갈 5:13; 벧전 2:16; 벧후 2:19; 요 8:34; 눅 1:74~75.

말씀 요절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벧전 2:16, 19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눅 1:74-75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교리 해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대해서는 8월 31일에 신앙고백서 20장 1절을 통해서 학습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책, 하나님의 정죄하는 진노, 그리고 도덕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를 누립니다. 이러한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살면서 현 세대의 악한 세력, 사탄, 그리고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자로 자유를 누립니다.
이러한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빠 아버지’ 사랑을 의지하면서 담대함으로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 믿음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읽는 신앙고백서 20장 3절은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복된 자유가 오용되어 파괴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며, 두 가지 경고와 한 가지 의무를 교훈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실로 행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첫 번째 사항은 죄악된 행위를 대범히 행하는 일입니다. 이를 경고하며 성경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갈 5:13)라고 교훈합니다. 육체의 기회를 삼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을 말합니다. 술 취함, 성적 부도덕, 탐욕 등의 죄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범하게 행하는 악행을 행하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이러한 악행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니라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욕정의 탐닉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죄책이나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 도덕법에 근거한 정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 취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하거나 오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작용하는 죄를 죽이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보양하며 은밀히 사랑하는 죄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교만이나 시기, 정욕, 분노, 비판과 정죄의 마음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오히려 강화하면서, 그것을 은혜가 허용하는 것처럼 여겨 자신의 악함을 돌아보지 않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잘못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며 그 자유를 주신 목적을 파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의 종에서 해방하신 것은,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 악을 행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자유를 구실로 죄의 습관에 빠지거나 욕정에 탐닉하는 것은,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위해 존재하는 자유, 곧 죄를 짓기 위한 자유가 되어버립니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본래 목적, 곧 거룩함을 이루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게 하려는 뜻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악한 행위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자유의 목적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결국 그리스도께서 자유하게 하신 자신의 영혼을 또한 파괴하는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 위험성에 대해 성경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고 경고합니다.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의 자유의 목적은 불법을 행하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님을 경고하면서, 이제 참된 목적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이”는 바로 앞서 부가되는 표현,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와 연결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심으로써, 사탄, 죄, 율법의 정죄, 하나님의 진노, 죽음과 두려움에서 영적으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구속의 은혜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힌 종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쁨과 담대함으로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성경이 말하듯, 우리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한 진리와 일치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자유를 허락하시는 구속의 은혜는, 그로 하여금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여기서 “성결”은 죄의 욕망과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된 상태를 의미하며, “의”는 마음과 행위가 하나님의 법에 일치된 상태를 뜻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지향하는 목적은 죄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신의 마음과 삶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일치시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데 있습니다.
끝으로 신앙고백서는 “종신토록”이라는 표현을 덧붙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내 주어지는 지속적인 은혜임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하나님을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도록 평생 부름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도가 누리는 특권이 결코 일시적이거나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지속되는 은혜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적용 질문
오늘 학습한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목적을 파괴하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위험을 경고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중생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죄성으로 인하여 완전하지 못할진데,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움이 없이 섬길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대한 확신을 오해하거나 오용하여, 죄의 습관이나 욕정에 대해 자신을 살피지 않고, 도리어 무관심하거나 방관한 적은 없습니까? 이러한 잘못으로 죄를 범한 적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을 “두려움이 없이” 섬기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예배와 생활 속에서 어떤 모양과 방식으로 두려움이 없는 섬김이 나타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두려움이 없이” 섬긴다는 것이 낯설고 어색합니까? 그렇다면 오늘 신앙고백서의 교훈을 통해 무엇을 배우십니까?

원고가 늦어져서이번 주 금요일 정도 나올 예정입니다그때까지 날마다 해당 본문 올려드리겠습니다‐--‐-------------9월 01일: 양심의 자유의 의미    고백서 20.2오직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님이시다.1) ...
01/09/2025

원고가 늦어져서
이번 주 금요일 정도 나올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날마다 해당 본문 올려드리겠습니다
‐--‐-------------

9월 01일: 양심의 자유의 의미
고백서 20.2
오직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님이시다.1) 하나님은 어떤 일에서든 자신의 말씀에 어긋나는 사람의 교훈과 계명에서, 또한 믿음이나 예배의 문제에 있어 말씀 외에 덧붙여진 사람의 교훈과 계명에서 양심을 자유롭게 하셨다.2)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이러한 교훈을 믿거나 이러한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양심의 참된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3) 그리고 무지한 믿음과 절대적이며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또한 이성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다.4)
1) 약 4:12; 롬 14:4.
2) 행 4:19; 5:29; 고전 7:23; 마 23:8~10; 고후 1:24; 마 15:9.
3) 골 2:20, 22~23; 갈 1:10; 2:4~5; 시 5:1.
4) 롬 10:17; 14:23; 사 8:20; 행 17:11; 요 4:22; 호 5:11; 계 13:12, 16~17; 렘 8:9.

말씀 요절
약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롬 14: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행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고후 1: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골 2:20, 22-23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계 13:12, 16-17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교리 해설
신앙고백서 20장 2절은 첫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진술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이 진술은 옳고 잘못된 것을 가려내는 내적인 도덕적 기능을 하는 양심을 판단하는 주인은 양심을 만드신 하나님뿐이심을 뜻합니다. 곧 양심은 그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을 따라 행하여야 할 권리와 자유를 지니며, 하나님께서 부정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을 권리와 자유를 또한 지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극적인 의미에서 사람이 세운 어떤 시민적이거나 종교적인 권위가 하나님의 교훈에 어긋날 경우, 사람은 이것을 순종할 어떤 의무를 갖지 않으며, 이것에 대한 거부를 행하는 것은 양심에 따른 자유로움을 갖습니다. 종교개혁 신학이 “오직 성경만으로”를 말할 때, 이것은 성경에 어긋나는 것을 배격할 것과 또한 성경에 명령하는 것만을 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성경을 이처럼 따르는 것이야말로 양심의 자유에 합당합니다.
특히 신앙고백서는 믿음과 예배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거나 금하지 않은 일에 대해, 사람의 교훈이나 계명으로 부과된 종교적 의무를 따르지 않을 자유가 양심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천주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 행위에 따른 연옥에서의 공로적 면벌,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독신 의무 등은 성경이 부과하지 않은 것들이므로, 이를 따르지 않는 것이 양심의 자유에 비추어 오히려 정당합니다. 이에 신앙고백서는 오히려 이러한 것에 순종하는 것은 “양심의 참된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분명히 교훈합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의 교훈만 믿어야 하는 것이며, 예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만을 따를 때 합법적이며 정당합니다. 이러한 원리를 개혁교회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로 삼습니다.
개혁교회의 이 원리는 “오직 성경”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루터교회와 같지만, 예배의 원리에 있어서는 서로 차이를 보입니다. 루터교회는 소위 “예배의 규범적 원리”(Normative Principle of Worship)를 따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금하지 않으신 것은, 곧 성경이 악기 사용이나 촛불, 시각 예술 등과 같은 요소에 대해 명시적인 판단 없이 침묵하는 경우, 그것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한 예배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인간은 본성상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기보다 자기 소견대로 하나님을 왜곡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예배 방식의 원리를 규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이실 뿐만 아니라, 예배를 하나님 그분 자신이 받으시기를 원하는 방식을 따라 받으실 것을 정하시는 예배의 주권자이시기도 합니다.
성경은 예배와 관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고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실제로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아니하신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에 삼켜져 죽은 사건(레 10:1–2)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결코 사람의 임의대로 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끝으로 오늘 읽는 신앙고백서 20장 2절은 “무지한 믿음”(Implicit Faith)과 “절대적이며 맹목적인 순종”(Absolute and Blind Faith)은 양심의 자유와 이성의 자유를 파괴한다는 점을 진술합니다.
“무지한 믿음”이란 믿는 바를 충분하게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그 내용을 알지도 못한 채, 단지 교회의 가르침을 교회의 권위를 신뢰하여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말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는 “무지한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마찬가지로 “절대적이며 맹목적인 순종”은 그리스도의 양심에 어긋납니다. 이것은 무지한 믿음에 의하여 어떤 교훈이 성경에서 인정되는지를 분별하거나 숙고하지도 못한 채 순종하도록 요구받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이것 또한 교회를 양심의 주인으로 섬기는 잘못이며 이성의 자유를 파괴합니다. 무지한 믿음과 절대적이며 맹목적인 순종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합니다.
무지한 믿음은 마음이나 믿음과 관련한 것이라면, 절대적이며 맹목적인 순종은 의지와 행위와 관련한 것이지만, 이 둘은 모두 그리스도의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믿어야 할 이유에 대한 양심의 자유를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아니라 교회 가르침의 권위에 두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신들이 믿는 바에 대하여 개인적이며 직접적인 양심에 따른 책임을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지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여야 합니다. 이해나 지식이 없이 어떤 것인가를 믿고 이를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참된 영적 예배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예배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신 말씀처럼, 성경이 규정한 바에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에 근거하여 드려야 하며,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 가운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하고 성경에 합당한 방식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예배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권위에 양심을 종속시키는 일이나, 그와 같은 것에 맹목적이고 무지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을 명백히 부정하고 거부합니다.

적용 질문
1.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은 여러분에게 믿음과 예배에 있어서 어떠한 원리를 교훈합니까?

2. 로마 가톨릭은 평신도는 “무지한 믿음”으로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맹목적으로 절대적인 순종을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양심과 이성의 자유를 파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교회가 가르치거나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지 살펴보는 데에는 무관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여러분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4. 오늘 배우신 신앙고백의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할 때, 교회가 회중에게 가르치는 예배와 믿음의 내용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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