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7/2025
나는야 1.5세 아줌마
말의 무게
나는 요즘 말의 무게를 고민한다. 예전엔 말이 참 가벼웠다. 농담처럼 던진 말들은 하하 웃으며 넘기고 비난 섞인 말들조차 어디에 남기지 않고 흘려보내는 것이 대인배이고 너그러운 사람인 양 여겨졌으니깐. 수많은 말들이 그냥 흩어졌다. 공기처럼 흘러갔고, 듣고 잊히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건 말이 말로만 존재하던 시대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금세 말의 앞뒤를 잊었고, 대화가 끝나면 마음에 남기지 않는 것이 예의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문자로, 댓글로, 이메일로, 디엠으로 말한다. 듣고 흘려보내는 말이 아니라, 기록되고 저장되고 스크린샷되는 말들이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말을 더 조심스럽게 하게 되었고, 동시에 더 많은 곳에 말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한 문장이 하나의 파일처럼 저장되고, 어떤 단어는 그대로 누군가의 마음속에 박제된다. 말은 이제 사라지지 않는다. 흔적이 되어 남고, 그 흔적은 때로 칼이 되거나 온기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늘 아슬아슬하게 줄을 탄다.
나는 자식을 잃은 부모다. 그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내 삶 곳곳에 스며 있고, 내가 하는 말과 글에 은연중에 드러난다. 브런치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시작된 나의 이야기, SNS에 남은 기록, 그리고 방송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내 말들이 전해졌다. 나는 말을 했다. 나의 이야기를, 상실을, 고통을, 그리고 그 안에 살아남은 마음들을. 말하기 시작한 이후로,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대부분은 처음엔 망설이다가 ‘실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말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나는 가능한 한 그 모든 말에 응답하고 싶어진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뿐이기에. 내가 먼저 겪은 길에서, 그들이 너무 혼자 아파하지 않도록. 아주 짧게라도 괜찮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말은 간혹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알아요, 저도 그래요.” 그 말 한 줄이 누군가에게는 깊은 호흡이 된다.
그러나 가끔 아니 종종 그다음 메시지가 오지 않을 때가 있다. 답장을 보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나는 불안해진다.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무심하거나 건조한 말을 한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준 건 아닐까. 두세 번 다시 읽어본다. 보내기 전에는 몰랐던 단어 하나, 문장의 흐름, 너무 짧았던 문장, 문장 끝의 마침표조차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다.
나는 상담사가 아니다. 종교인도 아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무조건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아니다. 그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그 마음을 짐작해 볼 뿐이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내가 보낸 몇 줄의 말이 누군가에겐 위로이길 바라지만, 혹시라도 다시 그 마음을 다치게 한 건 아닌지 마음이 쓰인다. 말은 물이 아니니깐……흘러가는 척하지만, 마음에 스며들어 버린다. 어떤 말은 잊히지 않고 자라난다. 말이 나무가 되기도, 혹은 그림자가 되기도 한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안다.
며칠 전, 한 분이 오랜만에 연락을 주셨다. 그분은 한참 동안 답장을 하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당신도 슬프실 텐데 저만 위로받는 게 염치없고 죄송했어요.” 나는 그 말을 보고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내가 두려웠던 건 나의 말이 상처가 되었을까 봐였는데, 그분은 내 아픔을 먼저 헤아리고 계셨던 것이다. 내 슬픔을 덜어주려 그저 조용히 물러나셨던 것이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무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 말은 훨씬 더 깊어지고 훨씬 더 아프고 훨씬 더 아름다워진다. 그 무게는 단지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크기와 깊이에 따라 달라진다. 말의 무게는 늘 양쪽이 함께 지니지만 그 무게는, 자주 말을 전하는 사람에게 더 큰 책임으로 돌아온다.
나는 말하는 사람이다. 글을 쓰고, 기록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나의 사회적 위치나 타이틀이 붙을수록, 그 말이 가지는 책임도 함께 따라온다. 나는 ‘엄마’이고 ‘학부모’이며 ‘작가’이고 ‘직원’이며 ‘위로받는 사람’이자 ‘위로하는 사람’이다. 예전엔 그냥 내 생각을 말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그 말이 누군가의 판단이나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 날 내가 무심코 했던 말이 누군가의 마음을 꿰뚫고 들어가 며칠을 잠 못 들게 할 수도 있고, 어떤 표현 하나가 그 사람의 방향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게다가 요즘은 말이 곧 기록으로 남는다. 문자, 댓글과 디엠 등 무심코 던진 말도 저장되고, 캡처되고, 다시 회자된다. 예전처럼 말이 사라지지 않기에,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말은 바람처럼 흘러가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땅 속으로 깊게 파고드는 뿌리처럼 남는다. 그래서 한 마디를 쓰기까지의 망설임이 길어지고, 쓰고 나서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침묵만이 해답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필요한 말을 해야 하고, 동시에 너무 가볍지 않게 해야 한다. 지나치게 날 선 말도, 지나치게 감정적인 말도, 모두 무게 중심을 잃는다. 결국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말이, 사람을 살리고 마음을 붙잡는다. 그 중심을 찾는 일이 말하는 사람의 몫이라면,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작가는 “나는 글을 쓸 때 늘 벼랑 끝에 선 듯한 기분으로 쓴다”라고 했는데, 어렴풋이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말에는 늘 긴장감이 있고, 조심스러움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너야 하는 다리가 있다.
나는 오늘도 말한다. 말하기 전에 한 번 멈추고 생각한다. 이 말이 누군가의 하루에 어떻게 닿을지를 생각하고 실수하지 않으려는 마음보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닿고 싶다는 마음으로 말을 한다. 말은 누군가를 무너지지 않게 지켜줄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고, 일으켜 세울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말로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건 언제나 조용한 혁명이 될 수 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여도, 그 사람의 내면 어딘가에는 아주 조용한 변화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말의 무게를 고민한다. 그리고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조심스레 다짐해 본다.